[겨울, 서귀포②] 이중섭 거리, 마음의 절벽으로 떠나는 여행

[겨울, 서귀포②] 이중섭 거리, 마음의 절벽으로 떠나는 여행

2017.12.08. 오전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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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서귀포②] 이중섭 거리, 마음의 절벽으로 떠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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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의 떠남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떠남이 반드시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정신적인 요소가 더욱 크게 작용한다.

오래된 책갈피에서 혹은 오랜만에 찾은 고향집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의 사진이나 메모를 발견하면 주저앉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이 거대한 시공간에서 사람이 갖는 절대적인 한계성을 느끼면 아득한 현기증이 생긴다.

[겨울, 서귀포②] 이중섭 거리, 마음의 절벽으로 떠나는 여행

서귀포의 이중섭 거리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죽어서 그의 이름을 딴 이 거리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문자 그대로 이중섭은 이제 역사다.

미술관에서 눈길이 간 것은 그의 그림보다는 오히려 편지들이었다. 편지를 들여다보면 흔히 ‘비운의 천재화가’라는 수사에 가려진 그의 삶이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천재화가라니. 이중섭이 들으면 그저 미소 한번 짓고 그 익숙한 사진 속 담배나 한 대 물지 않을까.

[겨울, 서귀포②] 이중섭 거리, 마음의 절벽으로 떠나는 여행

일반적으로 유명인의 생가나 박물관 등을 방문하면 뭔가 좀 과장되어 있고, 억지스러운 느낌이 들기 쉬우나 이중섭 거리에 있는 그의 방은 그렇지 않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1월에서 12월까지 가족이 같이 살았다는 한 칸짜리 방에 들어서면 이건 그냥 ‘리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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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데서 네 가족이 어떻게 누울까’ 한참 들여다보며 ‘자세’를 잡아보려 하지만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갇힌 느낌에 마당으로 나서면 언덕 아래 서귀포 풍경도 바다 외에는 모든 것이 바뀌는 듯한 착각이 든다.

세연교도 호텔들도 보이지 않고 오직 바다와 자갈, 그리고 초가집만이 떠오르는 그림 말이다.

[겨울, 서귀포②] 이중섭 거리, 마음의 절벽으로 떠나는 여행

그의 제주 생활을 상상한다. 빈곤의 극한을 달리며 잠자리는 최악이지만, 먹는 건 그래도 '물고기가 있었지 않았을까...' 이런 엉뚱한 생각마저 꼬리를 문다.

그래서일까, 그의 제주도 체류시절 그림엔 ‘게’가 많이도 등장한다.

너무 잡아먹어 미안해서 그렸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의 대표적인 주제인 ‘소’ 그림은 못 먹는 대상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것일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고개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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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과 그로인해 파생되는 빈곤이라는 고통에 빠져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예술가가 한 두 명인가.

하지만 후대에 재평가되는 문장들이 화려할수록 그들의 실제 삶은 더욱 더 비참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이 극과 극의 상관관계가 예술가의 삶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그림 값을 더 올리게 만드는 필요불가결의 요소일지도 모른다.

[겨울, 서귀포②] 이중섭 거리, 마음의 절벽으로 떠나는 여행

그렇다. 흔히 이들의 삶을 가리켜 ‘예술혼을 불태웠다’ 라고 한다.

하지만 예술혼 대신 가족과 함께 삶을 이루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평범한 그 길을 그들은 원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평범한 그 길이 어려워지면서 모든 뒤틀림이, 모든 갈망이 어쩔 수 없이 화폭에 쏟아진 게 아닐까.

이중섭 그림에 그렇게 조예가 깊지 않아도 그의 대표적인 주제인 소 그림을 들여다보면 내면의 부글부글 끓는 주체할 수 없는 격정이 터져 나오는 걸 느낄 수 있다.

[겨울, 서귀포②] 이중섭 거리, 마음의 절벽으로 떠나는 여행

지금도 일본에 살아있는 그의 부인 이남덕 (일본명 야마모토 마사코)은 이중섭이 ‘어느 시대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에 ‘제주도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아마도 가난했지만 그가 가족과 같이 시간을 보낸 곳이어서 일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곳 이중섭 미술관에서 발견한 것은 한국이 낳은 위대한 화가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아니라, 그저 가족을 만나고 싶었던 한 남자의 애끓는 가족애다.

[겨울, 서귀포②] 이중섭 거리, 마음의 절벽으로 떠나는 여행

거의 반사적으로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떠오른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이들을 연결하는 단어는 열정과 고통, 그리고 빈곤이다.

이북이 고향인 이중섭은 일본에 그림 유학을 떠날 정도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6·25는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는 생전에 부산에서 개인전을 가진 적도 있지만, 일본에 있는 가족을 보러 갈 수 없을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다.

다들 알다시피 빈센트 반 고흐는 살아생전 단 한 개의 그림을 팔았을 뿐이다.

[겨울, 서귀포②] 이중섭 거리, 마음의 절벽으로 떠나는 여행

그리하여 이 미술관에서, 이 작은 단칸방에서의 이중섭을 들여다볼수록 서귀포의 밤바다는 전혀 다른 색깔로 가슴속에 다가온다. 이런 것들이 이 글의 처음에 써두었던 마음을 향한 여행일 것이다.

어둠이 내리는 이 바닷가를 때론 웃으며 때론 쓸쓸하게 걸어 다녔을 그의 실루엣이 망막속에 잡혀올 것만 같다.

트레블라이프=양혁진 anywhere@travellife.co.kr

[겨울, 서귀포②] 이중섭 거리, 마음의 절벽으로 떠나는 여행

TRAVEL TIP: 이중섭거리는 시내 번화가에 위치해 서귀포 관광명소가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윗쪽으로 큰길만 건너면 바로 서귀포올레시장이 있으며 정방·천지연 폭포, 서귀포항이 도보로 가능한 거리에 있다.

서귀포에는 식당이 특화된 음식문화거리가 있다. 시내 쪽에 있는 아랑조을거리는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고 서귀포항 쪽의 칠십리음식특화거리는 갈치와 해물뚝배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이중섭거리와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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