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상징 '세운상가'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상징 '세운상가'

2015.11.09. 오전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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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상징 '세운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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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욕망하는 거라면 뭐든 다 줄 거야
환한 불빛으로 세운상가는 서 있고
오늘도 나는 끊임없이 다가간다.
잡힐 듯 달아나는
마음 사막 저편의 신기루를 향하여,

-유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에서-

50-60년대 사춘기를 보낸 이에게 안정효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유년시절의 기록이라면, 유하의 시집 '세운 상가 키드의 사랑'은 지금 아버지 세대의 청춘 이력서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시인이자 영화 감독인 유하의 '세운 상가 키드의 사랑'은 세운상가를 기록할때 맨앞에 떠오르는 발문이 되었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계보를 꿰뚫고 담배 연기 매케한 재개봉관 개구멍을 찾던 할아버지 세대의 DNA는, 불법음반과 비디오를 찾는 우리 시대 아버지의 핏속으로 유전된 것이다.
두려움과 설레임, 일탈의 첫사랑말이다.

추억의 마침표도 비슷한 시간대를 연결한다. 90년대 말 대한극장과 단성사로 대표되던 영화 개봉관이 멀티플렉스에 떠밀려 문을 닫았고, 세운상가도 10여년후 청계천 복원공사의 후속편으로 재개발 논의가 본격 진행되기 시작했다.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상징 '세운상가'

세운상가 재개발의 해머소리가 끝나지 않음은 1960년대 말 완공 당시 대지 4933평, 연면적 6만2284평으로 기록된 공룡같은 덩치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 세운상가는 아직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다. 때로는 도심의 을씨년스러움으로, 때로는 마지막 항복의 순간까지 품위를 잃지 않는 늙은 장군의 모습으로 말이다.

◆ 영화세트장 같은 골목들

지하철 종로 3가에 내려 세운상가를 찾아가는 거리엔 오래된 레코드 가게들이 불쑥불쑥 시선을 잡아끈다.
반가운 마음에 두리번 거리지만, 이미 집엔 그 테잎을 살아나게 해줄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도 없다.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상징 '세운상가'

세운상가는 쇠락의 흔적만을 예상케한 예상을 뒤집었다.
전자,오디오,철공을 취급하는 많은 가게와 좁은 공간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축적된 오랜 기술과 단골 손님들이 세운상가가 아직은 역사박물관이 아닌 치열한 삶의 현장임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상징 '세운상가'

하지만 정교한 세트장을 연상시키는 오래된 골목들과 문을 닫은 점포들, 그리고 돌계단에 아무렇게나 피어난 꽃들은 어쩔수 없는 세운상가의 현주소다.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상징 '세운상가'

한때 '원자폭탄을 제외하곤 못 만드는게 없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휘황찬란함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연명이다.

세운 상가는 1990년대 용산이 전자상가의 메카로 떠오르며 쇠락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본격적인 몰락이 시작됐다. 그후 상가를 철거하고 녹지공간을 만드는 사업이 추진됐지만 그마저도 지지부진하다. 껑충 뛴 땅값때문에 정비사업성이 떨어진다는게 주된 이유다.

초록띠 공원이란 정체불명의 이름과 골목골목 작은 공업사와 전파사들은 현재의 공존과 미래의 불투명함을 서로 끌어안고 있다.

세운상가의 최전성기엔 미래의 불투명함은 온전히 그곳을 들락거리던 청춘의 몫이었다.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상징 '세운상가'

세운상가 건물은 그 내부 구조의 독특함으로 많은 영화의 촬영장소가 되었지만, 이처럼 텅빈 골목들이 던져주는 세월의 무상함에 비할바는 아니다.

그 허무함과 비장함이 가뿐 숨을 몰아쉬며, 추억을 더듬는 많은 이의 발걸음을 잡아챈다.

그 자신이 세운상가에서 기계를 다루던 기술자 출신인 김기덕 감독이 죄와 구원을 테마로 한 '피에타'의 촬영지로 세운상가의 골목들을 선택한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닐까.

◆ 마지막 아날로그의 상징

세운상가의 조명 가게는 대낮에도 반짝반짝 빛을 낸다. 그 인공빛은 완공당시 군인 출신인 김현옥 전 서울시장이 '세상의 기운이 다 모여라'라는 뜻으로 명명한 세운(世運)의 뜻을 기억케 한다.

70-80년대 가난을 딪고 경제부흥을 꿈꿨던 시절, 독재하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았을 세운상가가 억압된 청춘들의 자유의 비상구가 된것은 아이러니하다.

안정효의 소설이 50-60년대 가난하던 시절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면, 유하의 시는 70-80년대 청춘들의 두려움과 저항, 좌절과 도피의 노래인 것이다.

지금 시대 청년들의 불안과 욕망을 상징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그들의 해적음반과 불법비디오는 모두 스마트폰속에 담겨 재생되고 있는가.

시대는 그렇게 또 한세대를 지탱하는 문화 아이콘을 열어놓은지 오래다.

트레블라이프=양혁진 travel-life@naver.com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상징 '세운상가'

travel tip= 세운상가는 종로3가 지하철역을 이용하면 된다. 세운상가에서 충무로까지 걸어가면 도심 곳곳에서 옛 향취를 느낄수 있는 골목들이 많다. 또한 대로 건너편에는 동묘가 있어 가족단위 여행이라면 추천할만하다. 빈대떡과 육회로 대표되는 광장시장도 지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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