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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앤피플] “서양화 거장 장욱진, 100년 뛰어 넘다” 김동건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장
[피플앤피플] “서양화 거장 장욱진, 100년 뛰어 넘다” 김동건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장
Posted : 2017-08-04 09:49
“나는 심플(Simple)하다.”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서양화가 故 장욱진(1917-1990) 선생이 생전에 강조한 말이다. 올해는 장 화백 탄생 100주년이다.

장욱진 화백은 박수근, 이중섭과 함께 우리나라 미술계를 이끈 거장으로 꼽힌다. 국내에 서양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던 1930년대부터 가족, 아이, 새, 나무, 마을 등 한국적 소재와 단순함을 바탕으로 서정적 이념을 표현했다.

장 화백은 “미술은 가장 보편적인 언어라서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있고, 누구도 좋아할 수 있는 것이며, 누구도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순진한 아이가 그린 그림 같기도 하다.

[피플앤피플] “서양화 거장 장욱진, 100년 뛰어 넘다” 김동건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장

옛 사람들은 서화를 보면서 ‘그 사람에 그 그림(기인기화, 其人其畵)’이란 말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즉, 화가의 작품과 함께 인격도 봤다는 말이다.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동건 변호사(71, 전 서울고등법원장)는 “장 화백 인생 자체가 바로 ‘그 인격에 그 그림’이었다”며 “그의 곧은 인품과 그림의 심플함 때문에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장 화백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피플앤피플] “서양화 거장 장욱진, 100년 뛰어 넘다” 김동건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장

다음은 김동건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장과의 일문일답이다.

Q. 장욱진화백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1979년 당시 저는 법관직에 있었지만 미술에 관심이 커 공부를 하고 있었다. 우연히 현대화랑에서 열린 장 화백 전시회를 관람하면서 그의 작품에 매료됐고, 도예가 윤광조 씨를 통해 장 화백과 첫 인사를 나누게 됐다. 이후 명륜동, 수안보, 신갈로 자주 장 화백을 찾아뵀다. 그 장소 모두 100년 넘은 고택으로 선생의 삶과 예술이 깃든 시골 새벽의 고요함과 고독이 있었다. 또 장 화백 인간 자체에 대한 공감의 지평이 넓어지기도 했다. 화백께서 돌아가시고, 1997년 장욱진미술문화재단이 발족되면서 설립 초기에 자연스럽게 이사진으로 참여하게 됐다. 이후 장욱진미술관 건립을 위해 2011년부터 이사장을 맡게 되면서 양주시립 장욱진 미술관과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 수행, 세종시 연동면의 생가 복원, 기념관 건립 등에 동참했다.

[피플앤피플] “서양화 거장 장욱진, 100년 뛰어 넘다” 김동건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장

Q. 장욱진 화백에 대해 소개해 달라.

오늘의 세종시 연동면인 충남 연기군 동면 송룡리에서 태어나셨고 경성사범 부속 보통학교 시절, 전일본소학생미전에서 1등을 할 정도로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서양화가 1세대인 고희동, 나혜석에 이어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유영국 등과 함께 2세대에 속한다. 1954년 서울대 미대 교수가 됐지만 작품에 몰두하기 위해 1960년 사임했다. 이후 한강변의 덕소를 거쳐 명륜동 자택과 수안보, 용인의 신갈에 화실을 마련해 그림에 전념했다. 1990년 유명을 달리하고 1991년 유골을 모신 곳에 탑비를 세웠는데 비문에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군더더기를 없애기 위해 얼마나 고독과 독대하며 치열하게 살았는지가 드러난다.

‘심플한 그림을 찾아 나섰던 구도의 긴 여로 끝에 선생은 마침내 고향땅 송룡마을에 돌아와 영생처로 삼았다. 천구백구십년 세모의 귀천이니 태어나서 칠십삼 년 만이었다. 선생은 타고난 화가였다. 어린 날 까치를 그리자 집안의 반대는 열화 같았고 세상은 천형으로 알았지만 그림이 생명이라 믿었던 마음은 드깊어 갔다. 일제 땅 무사시노대학의 양화공부로 오히려 한국미술의 빛나는 정수를 깨쳤다. 선생은 타고난 자유인이었다. 가정의 안락이나 서울대학 교수 같은 세속의 명리는 도무지 인연이 없었다. 오로지 아름다움에다 착함을 더한 데에 진실이 있음을 믿고 그것을 찾아 한평생 쉼없이 정진했다. 세속으로부터 자유를 누린 대신, 그림에 자연의 넉넉함을 담아 세상을 감쌌고 일상의 따뜻함을 담아 가족사랑을 실천했다. 맑고 푸근한 인품이 꼭 그림 같았던 선생을 기리는 문하의 뜻을 모아 최종태는 돌을 쪼았고 김형국은 글을 적었다. 천구백구십일년 사월.’

또한 장 화백의 그림은 어린 아이와 부모님, 즉 가족 모두가 좋아한다. 난해함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의 작품이 미래 세대에 열려있고 소통이 잘 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지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지만, 미래 세대에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므로 탄생 200주년 기념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플앤피플] “서양화 거장 장욱진, 100년 뛰어 넘다” 김동건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장

Q. 이사장께서 직접 본 장 화백은 어떤 분이었나?

일제시대와 해방 후 공간에서는 물론 산업화, 민주화 단계를 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화가들 중에서 최고의 도덕성을 갖추셨다고 자부한다. 활동하시는 동안 작품 판매를 위해 개인이나 공공단체에 의존하는 것을 싫어하셨고, 상을 받기 위해 스스로 명리를 구하는 행위를 하지 않으셨다. 예를 들면, 상 주는 기관에서 대상자를 제대로 가려서 정하는 게 아니라 그럴듯한 사람에게 사전에 알리면 당사자가 직접 자술서를 적어야 하고 자신에게 찬성표를 달라고 기성 회원들에게 알려하 하는 씁쓸한 관행이 있었음을 알고 이를 멀리했다. 이에 장욱진 평전을 낸 김형국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장 화백이야 말로 작품과 인격이 같이 가는, 즉 선한 사람이 좋은 그림을 그려낸 대표적 전범”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장 화백의 성품을 보여주는 또다른 면은, 그의 제자가 많다는 사실이다. 서울대 미대 교수로 계시다가 6년만에 사직하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걸으셨는데도 제자가 가장 많다. 뿐만 아니라 조각가, 도예가는 물론 수많은 예술가들이 사숙하고 예술 외의 분야에 종사하는 교수, 변호사, 의사, 여성 활동가 등 따르는 분이 참 많다고 느꼈다. 평소 “천하의 영재들을 구하여 벗하며, 술을 마시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하셨다.

[피플앤피플] “서양화 거장 장욱진, 100년 뛰어 넘다” 김동건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장

Q. 장욱진 화백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어떤 전시회들이 열리고 있나?

현재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에서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연중 100주년 기념전이 열리고 있다. 내용은 ‘장욱진드로잉전’, ‘100주년기념전’, ‘SIMPLE 2017장욱진과 나무’, 상설전인 ‘장욱진의 사람과 예술세계’ 등이다.

[피플앤피플] “서양화 거장 장욱진, 100년 뛰어 넘다” 김동건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장

용인 신갈 고택에서는 ‘장욱진 드로잉전’이 진행되고 있고, 세종시에서는 연동면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건립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 인사동 가나화랑에서는 오는 27일까지 100주년 기념전이 열린다. 세종시에 있는 국립도서관에서는 오는 10월 9일 한글날부터 전시회가 계획돼 있다.

[피플앤피플] “서양화 거장 장욱진, 100년 뛰어 넘다” 김동건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장

특히 가나화랑에서는 전시장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전관에서 장욱진의 작품을 연대기 순서로 모았다. 전시는 지역별로 나뉘는데, 장 화백이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덕소시절(1963~1975)을 비롯해 명륜동 시절(1975~1979), 수안보 시절(1980~1985), 신갈 시절(1986~1990)로 구성됐다. 또한 양주시 장흥유원지에 생긴 ‘장욱진 미술관’이 화제였다. 화가 장욱진을 기리는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이 장흥의 따스한 양지에 그의 그림처럼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은 축복이다.

[YTN PLUS] 취재 공영주 기자, 사진 정원호 기자,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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