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질이 초상에 상포 20척" 노비가 남긴 한글 문서

"모질이 초상에 상포 20척" 노비가 남긴 한글 문서

2016.06.28. 오후 6:01
댓글
글자크기설정
인쇄하기
AD
방금 듣고 오신 노래는 1968년 한글날을 맞아 만든 '한글은 우리의 얼'이라는 노래입니다.

노래 중에 '새 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라는 가사가 나오는데요.

조선시대, 한글 창제는 일반 백성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이 정겨운 이름 좀 보시죠, 황강아지, 이수저, 강돌상, 노막산… 별 뜻 없이 순우리말로 지어진 이 이름은 조선 시대 노비들의 이름입니다.

이것은 경남 진주 재령 이 씨 종가의 고문서 더미에서 발견된 '상계 문서'인데요.

18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이 집안 노비와 마을 백성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상계는 상을 치르고 제사 지내는 일을 서로 돕기 위해서 만든 계인데, 노비와 가난한 백성들도 이렇듯 계를 만들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서로 도왔던 겁니다.

양반들이 한자로 적은 계 문서야 대대손손 전해져 내려오곤 했지만, 이렇게 노비들이 직접 한글로 적은 문서가 잘 보존돼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재령 이 씨 가문이 부리는 사람들이며 소작농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이 남긴 문서까지 잘 보관해왔기 때문으로 보이는데요, 좀 자세히 볼까요?

문서는 계원 명단을 적은 계안(契案)과 돈의 출납을 적은 치부(置簿)로 구성돼 있는데, 상을 당한 사람의 이름과 부조 물품, 시기를 적고 임원들이 확인 서명을 했습니다.

"김일천이 모상 시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 상포 사십 척을 몰소 전급한다, 돈으로 쳐서 준다" 는 식으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잘 읽어보면 3년 상을 치른 뒤 첫 제사 때에도 술 빚는 누룩과 나락을 부조하면서 서로 살뜰히 챙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말이 서로 맞지 않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자기 뜻을 펼 수 없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아무리 비천한 신분이라도 뜻하는 바를 펼치게 하고 싶었던 세종대왕의 마음.

250년 전, 노비들이 남긴 계 문서는 임금의 그 마음이 실제 백성의 삶 곳곳에 미쳐 '새 세상'을 열어주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직접 보고 싶으신 분들은 다음 달 1일부터 연말까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시실에서 열리는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 특별전을 찾으시면 되겠습니다.

궁중과 민간의 아름다운 한글 자료 백여 점이 전시됩니다.

나연수 [ysna@ytn.co.kr]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