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니 시리즈 49]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는 것에 대해

[해보니 시리즈 49]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는 것에 대해

2018.09.29. 오전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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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니 시리즈 49]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는 것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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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툰 '며느라기' 캡처)

지난 추석을 맞아 웹툰 '며느라기'가 특집 연재됐다. 명절이면 시가의 노동을 도맡았던 며느리 민사린이 이번 추석 때는 시가 아닌 친정을 먼저 찾는 에피소드다.

그 과정엔 남편 무구영의 우유부단한 태도와 친정어머니의 우려, 며느리로서의 내적 갈등 같은 장애물이 있었다. 민사린은 이런 난관을 헤치고 추석 저녁에 시가를 찾았지만, 도착하자마자 시어머니를 도와 부엌에 섰다. 남편 무구영과 시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TV를 본다.

나는 결혼을 하고 세 번의 명절을 보내면서 시댁에 가지 않았다. 멋쩍게도 민사린처럼 투쟁한 건 아니다. 남편이 명절마다 출근하거나 출장을 가는 특수 상황 때문이었다. 이번 추석을 앞두고도 그는 출장에 갔다.

사정을 잘 알고 계신 시어머니는 추석을 앞두고 "모처럼 연휴인데 집에서 쉬어라", "미리 성묘했으니 우리도 시골에 가지 않고 집에서 쉴 거야. 친정에 다녀오는 게 어떻겠니?" 하신다. 당신도 며느리이므로 명절 노동에 대해 잘 알고 계실 시어머니도 이번 추석엔 쉬기로 하셨다.

시아버지는 매번 시골에 내려가지 않는 며느리에게 "내년에도 성묘만 하고 차례는 없애는 쪽으로 하자"라고 말씀하신다. 명절에 못 만나도 언제든 볼 수 있고, 음식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으니 각자의 일정에 맞추자는 설명이었다.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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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번 추석은 지방에 있는 친정에서 보냈다. 명절에 친정을 찾은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친정에서는 몇 년 전부터 우리 네 식구끼리 간단히 차례를 지낸다. 그러나 아무리 간단히, 양을 적게 한다고 해도 차례 음식은 종류별로 있어야 했고, 남는 음식도 많았다. 상을 한 번 차리고 나면 설거짓거리가 쌓였다.

친정이라고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나는 거절당할 각오로 제안했다. '내년 명절부터는 차례를 생략하고 가족이 잠들어 있는 추모 공원을 찾자.'

평생을 작은 지방에서 며느리이자 아내로 살아온 친정어머니의 반응이 놀라웠다. 친정어머니는 선뜻 "그래, 이제는 나도 조금 편하게 살자. 추모로 예를 차리고, 명절에 가족끼리 외식을 하거나 좀 놀러도 가고"라고 답했다. 이 단호한 선언에 반대하는 가족은 없었다.

어른들 입에서 비로소 이런 선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족이 모두 모여 차례 음식을 먹고 치우기를 반복하고, 그 노동이 여성들에게 쏠려있는 문제를 양가 어른들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사뭇 놀라우면서도 반가웠다.

명절마다 논쟁이 되는 남녀 갈등, 세대 갈등 문제의 본질은 차례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치우는 사람이 어머니, 며느리, 딸, 즉 '여성'이라는 게 너무나도 당연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이 명절 노동을 파업하면, 자연스럽게 차례가 축소되고 없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결혼 3년 차인 여성 김(28) 모 씨도 이런 이유로 명절 가사 노동을 하지 않는다. 그는 기자에게 "결혼할 무렵 시어머니 건강이 좋지 않았고 남편도 차례 음식을 과하게 만드는 것에 부정적이었다"며 "그래서 명절엔 힘들게 일하지 않고 차례 음식을 사기로 시가와 합의했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해왔다"라고 밝혔다.

김 씨는 "사온 음식으로 간단히 식구들끼리 밥을 먹는 것이 명절을 간소화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해보니 시리즈 49]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는 것에 대해

추석 연휴엔 온라인에도 "시댁에 안 갔다"는 며느리들의 글이 쏟아졌다. "며느리들이 시댁에 가라고 있는 명절이 아니다", "이번엔 아이와 남편만 시가에 보냈다", "그동안의 시집살이에 지쳐 올해 추석부터는 각자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와 같은 사연들이 부쩍 눈에 띄었다.

이런 글에는 대체로 '잘했다'와 '부럽다'는 댓글이 이어진다. 여전히 명절마다 가사 노동을 책임지는 며느리들이 힘듦을 호소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은 추석을 앞두고 시민 1,170명에게 명절에 느낀 성차별 사례를 조사했다. 남녀 응답자의 53.3%가 '명절에 여성만 하게 되는 상차림 등 가사분담'(1위) 을 꼽았다.

조사에 응답한 남녀는 성차별 사례를 묻는 주관식 문항에 이렇게 답했다. "새벽부터 여자들만 준비하고, 남편은 피곤하니 상 차리고 깨우자는 시댁", "남자들은 TV보고 윷놀이, 여자들은 차례 준비와 설거지, 안주 차리기", "친정에는 못 가도 시가에는 반드시 가야 한다는 남성 중심적 관행" 등 대부분 비슷한 맥락이었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새로울 것 없는 문제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더는 전통을 이유로 여성들에게만 명절 노동을 강요해선 안 된다는 데 이견이 없다. 명절에 남성들도 여성과 함께 가사 노동을 하는 것, 며느리들이 시댁에 가지 않아도 문제없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 외 모든 가부장적인 요소들을 없애는 것, 이제 각 가정에 주어진 책임 같은 건 아닐까.

YTN PLUS 문지영 기자
(moon@ytn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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