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신문고] 죽은 채권의 부활... "짓밟힌 재기의 꿈"

[국민신문고] 죽은 채권의 부활... "짓밟힌 재기의 꿈"

2017.06.01. 오후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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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신용불량자가 되면 금융거래가 불가능해지고, 취업 등에서 큰 불이익을 받아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정부가 운영하는 신용회복 프로그램을 신청해 재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어느 날 낯선 대부업체가 대출 채권을 들고 나타나 감당하기 어려운 돈을 갚으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날벼락이겠죠.
채권 유통기한, 채권 소멸시효가 끝난 이른바 죽은 채권이 시장에서 비밀리에 거래되면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죽은 채권이 거래되는 구조와 피해 사례 등을 이연아 기자가 현장 취재했습니다.

[기사]
올해 나이 52살 김광규 씨의 하루는 외줄 타기처럼 아슬아슬합니다.

한 가정의 가장인 김 씨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김 씨는 한 건설회사의 정직원이었습니다.

갑자기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급하게 제2 금융권의 한 회사에서 원금 90만 원을 연 이자 30%로 빌렸습니다.

제 1금융권에서도 이미 대출을 받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김 광 규 / ‘죽은 채권’ 피해자 : 90만 원 정도면 (당시 받던) 급여의 절반 정도 밖에 안 됐기 때문에 부담 없이 갚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해서...]

하지만 두 달 뒤 직장을 잃은 김 씨, 그때부터 대출금과 이자 상환이 미뤄졌고 급기야 신용불량자가 됐습니다.

[김 광 규 / ‘죽은 채권’ 피해자 : 실직 여파로 돈이 많이 필요하게 됐고, 취업도 원활하게 되지 않았고 그렇게 1년 반이 지난 후에는 제가 생각할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이자가 붙어있는 상태라 감당이 안 돼서 방치를 해두고 포기를 했었죠.]

대인기피증과 우울증까지 시달렸던 김 씨, 지난 2013년 신용불량자로 살아온 10여 년의 세월을 정리하고자 용기를 냈습니다.

정부에 신용회복을 신청했고 원금과 이자가 더해진 6천여만 원 가운데 4분의 3을 탕감 받아 지난 3월 모든 빚을 정리한 겁니다.

[김 광 규 / ‘죽은 채권’ 피해자 : 여기서 포기하면 제 인생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어요. 이제는 (신용 회복도 되고) 새롭게 제가 깨끗해졌으니까 ‘나도 이제 남들과 어깨 견주면서 사회생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기쁨도 잠시, 19년 전 제2금융권에서 빌린 90 만원 때문에 김 씨는 신용불량자가 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유통 기한처럼, 채권에도 소멸시효란 것이 있습니다.

빚에 대해 채권업체가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권리가 소멸되는 제도입니다.

보통 금융회사 대출 채권의 소멸시효는 연체 시작일로부터 5년.

금융회사가 채권의 소멸시효가 넘어가도록 채권을 회수하지 못하면 이른바 '죽은 채권'으로 분류해야 하지만법망의 허술함 속에 대부분의 업체들이 5~10% 가격에 이를 다른 업체에 되팔고 있고 김 씨도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대출 채권을 헐값에 사들인 한 대부업체가 정부의 신용회복 프로그램 참여를 거부하고, 직접 회수를 선택했는데, 이 사실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고 몇 년이 흘러 김 씨에게 들이닥쳤던 겁니다.

이럴 경우, 2주 안에 이의신청을 하면 채권 소멸을 인정받을 수 있지만, 이 사실을 몰랐던 김 씨가 그냥 지나치면서 다시 5년이라는 시효가 되살아났습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 : 소멸시효 완성 채권은 (매각하는 행위가}지금 현재 현행법상 불법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거든요. 사실 채무자가 항변하면 안 갚을 수 있는 것들인데 소멸시효 제도 자체를 몰라서 그냥 갚아서 당하는 채무자가 많아서...)

심지어 김 씨는 자신의 채권이 언제 어느 회사로 팔렸는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김 광 규 / ‘죽은 채권’ 피해자 : (기자: 채권 매각을 어떻게 아셨어요?) 통장이 압류됐는데 은행에 물어보니까 00 대부업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 들어보는 이 업체는 원금과 이자로 600여만 원을 갚으라고 요구했지만, 김 씨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 업체는 김 씨가 가까스로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나 개설한 통장을 압류 했습니다.

이 통장에는 췌장암에 걸린 어머니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렵게 마련한 돈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안 창 현 / 변호사 : 부실채권을 매입하는 주체들이 무분별하게 시장에 난입 돼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중에 전혀 내가 빌린 금융기관이 아닌 다른 업체나 개인들로부터 채권을 추심당하는 그런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렇게 좀비처럼 살아 돌아온 채권은 김 씨의 발목을 잡고 재기를 향한 도전을 막고 있습니다.

추심하는 대부업체는 김 씨에게 완납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정부 지원을 받아 가발 사업을 시작한 김 씨, 기술 특허까지 받았지만 언제 채권자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져만 갑니다.

[김 광 규 / ‘죽은 채권’피해자 : 굉장한 스트레스고 제가 신용 회복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의미를 찾을 수가 없는 거죠. 전혀. (신용회복을 하기 전) 그 상태와 같아졌다고 하는 거죠. 또 이런 현상이 오니까 절망인 거죠.]

죽은 채권의 무자비한 빚 독촉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난달 한 대학병원에서 말기암 선고를 받은 62살 신 모 씨.

신 씨에게 주어진 남은 생을 정리하기에도 부족한 3개월이지만 그는 지금 오로지 10여 년 전 빌렸던 돈에 대한 걱정뿐입니다.

[신 모 씨 / ‘죽은 채권’ 피해자 : 자식한테까지는 (채무가) 안 내려갔으면 좋을 텐데 모르겠습니다. 내가 만약에 죽으면 자식한테 넘어간다는 거 남들은 재산을 물려주고 간다든지 할 텐데 제일 그게 (걱정되고) 결혼해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상태라면 걱정을 안 하는데 아직 결혼도 안 했고 제일 슬픕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신 씨는 지난 2004년 한 카드회사로부터 1천만 원을 빌렸습니다.

사업 실패로 빚을 갚지 못하고, 신용불량자까지 되며 신 씨의 사정은 더욱 악화돼 갔습니다.

빚을 갚으려면 경제 활동이 필수지만, 모든 통장이 압류된 탓에 제대로 된 활동이 불가능했습니다.

[강 형 구 / 금융소비자연맹 금융국장 : 문제가 많습니다. 왜 그러냐면 거래하는 특정 통장을 압류하면 되는데요 모든 은행의 통장에 대해서 무차별적으로 압류합니다. 그리고 다른 은행에도 동일한 채권 금액을 가지고 여러 은행에 압류합니다. 이건 권리 남용이 될 수도 있고요 더군다나 소득이 적은 이런 계층들은 통장 금액이 적은 경우에도 압류가 될 수 있어서 생계도 더욱 압박되고 채무자를 더욱 자포자기하게 만듭니다.]

주유소 아르바이트 등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간 5년.

그러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신용회복 프로그램을 신청했고, 4년 전부터 매달 14만 원씩 10여 년 동안 빚을 갚기로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처음 본 대부업체가 13년 전 빌린 돈을갚으라고 독촉을 해왔습니다.

알고 보니 신용회복 프로그램 신청 당시 신 씨의 흩어진 채권을 찾는 과정에서 해당 카드회사의 채권만 빠졌는데 이 카드사가 이른바 죽은 채권을 헐값에 이 대부 업체에 팔아넘겼던 겁니다.

신 씨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큰 빚에 놀라 일단 일부를 송금했는데 그 순간 죽은 채권의 시효가 되살아났습니다.

[안 창 현 / 변호사 : 소멸시효가 완성된 경우에는 그런 조처를 하더라도 채무가 소멸하여야 하는 게 원칙인데 소멸시효가 완성된 이후에 이자를 지급한다든지 그다음에 채무를 인정하는 내용의 서류를 써준다든지 이렇게 되면 소멸시효 완성 이후에도 ‘소멸 시효 이익을 스스로 포기했구나’ 이렇게 취급을 해서 소멸시효가 다시 진행하게 되는 그래서 추심이 가능한 생황이 생기고요.

원금 1천만 원, 이자까지 복리로 불어나 4천500여만 원이 신 씨 가정의 목을 조이고 있습니다.

[유 모 씨 / ‘죽은 채권’ 피해자 아내 : 희망이 좀 생겼던 것 같아요. ‘내가 이렇게 해서 몇 년만 더 갚으면 내 자식들한테는 최소한 내려가지 않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느닷없이 00 카드에서 날아와서 그러면 어떡하느냐 그것도 갚자. 그래서 힘들어하면서 그것도 갚아나가고 있는데 몸이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현실을) 부정하죠.병원에서 자꾸 포기하지 말고 치료를 하라고 하는데 정말 애들 생각하면 평생 해준 거 한 개도 없고 진짜 용돈 한 번을 제대로 못 줘보고 저는 벌어서 먹고살기 바빴고
그러고 살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암이 걸렸다고 그러니까. 남편은 돈 못 갚으면 그게 우리 애들한테 내려갈까 봐.]

소멸시효를 둘러싼 법의 허점이 너무 많은데다 채무자는 각종 정보에서 소외되는 약자일 수밖에 없어 현대판 노비 문서인 ‘죽은채권의 부활’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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