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계 대부 별세...이홍렬이 본 구봉서

희극계 대부 별세...이홍렬이 본 구봉서

2016.08.27. 오전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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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렬 / 개그맨

[앵커]
코미디언 구봉서 씨가 별세를 했는데요. 한국 코미디언 1세대인 구 씨는 배삼룡, 서영춘 씨와 함께 한국 코미디계를 이끌어온 대부이자 거목입니다. 평소 고 구봉서 씨와 친분이 돈독했던 후배 코미디언 이홍렬 씨 전화로 연결해서 고인에 대한 얘기 잠시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네, 이홍렬입니다.

[앵커]
안타까운 소식인데요.

[인터뷰]
저도 오늘 아침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직 장지는, 빈소는 가보지 못했는데요. 일을 마저 빨리 끝내고 가볼 예정입니다.

[앵커]
고 구봉서 씨는 알려진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인데요. 특히 존경하는 구봉서 선배에 대한 기억, 특별한 기억 같은 것을 갖고 계십니까?

[인터뷰]
많이 있죠. 특히 한창 활동하실 때 많은 후배들이 코미디계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면서 모시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코미디계의 산증인이고 희극인하면 대표적인 인물 아니겠습니까? 저 같은 경우에는 어린시절에 구봉서 선생님, 서영춘 선생님, 또 곽규석, 이런 많은 분들을 보면서 꿈을 키워온 사람 중에 한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 이 소식은 너무 많이 가슴이 아픕니다.

굉장히 엄격하시고 자상하신 분이었어요. 특히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28년 전 쯤이죠. 그러니까 저희 큰 아이의 돌 때 저희 집을 찾아오셨는데 찾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밖으로 나가 보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시더니 집으로 안 들어가세요. 그래서 저는 들어가시라고 했는데 그 자리에서 돌반지를 하나 전해 주시면서 다들 어려워할 것이니까 나는 돌아가겠다, 그러면서 돌아가셨는데. 남들, 후배들을 배려한 거죠, 그 안에 후배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 때는 잘 몰랐는데 제가 구봉서 선생님의 그 나이가 되니까 그게 뭔지 알겠더라고요.

제 스스로 그런 행동들을 많이 하니까. 그래서 저는 그야말로 아버지라고 생각하면서 늘 모셨는데 굉장히 마음이 아픕니다.

[앵커]
그러면 구봉서 선생님과 마지막 봤던 게 언제이셨습니까?

[인터뷰]
작년 설이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설날마다 세배를 드리러 가는데 그래봐야 한 5년밖에 안 됐습니다. 마음이 약해지셨는지 저를 보면 늘 예뻐하셨는데 그때 한번 어떤 말씀을 하셨냐면 왜 소식이 없어, 이놈아. 너 나 죽은 다음에 소식 줄 거야, 이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유, 자주 찾아봬야 되겠구나 생각하고 꼭꼭 인사를 드렸는데 작년 설에는, 그 전까지는 늘 웃어서 앉아서 저를 맞이해 주셨는데 작년 설에는 누워계셨어요. 그래서 어쩐 일입니까, 하니까 워낙 다리 한쪽이 예전에 촬영할 때 다친 거는 우리들 많이 알고 있는데 다리가, 집에서 넘어져서 깁스를 했는데 금방 푸셨대요.

그래서 누워계셨는데 누워서 절을 받으셨습니다. 받으셨고 그날은 우셨어요. 그동안 찾아뵀었을 때는 몰랐는데 그날은 사모님 얘기를 하면서 저 사람이 불쌍해 그러면서 우셨는데 참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빨리 다리가 빨리 완쾌되셨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돌아왔거든요. 살아계신다는 자체가 우리 코미디계에서는 굉장히 큰 보이지 않는, 많은 에너지를 주는 힘이셨거든요. 너무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앵커]
향년 90세니까 조금 더 사셨었을 수도 있을 텐데 조금 안타까운데요. 구봉서 선생님이 우리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인데요. 서영춘 선생이라든지 배삼룡 씨, 곽규석 씨. 지금 1세대 코미디계의 맏형, 대부라고 하시는 분들은 이제 지금 생존해 계신 분이 거의 없죠?

[인터뷰]
네, 많이들 돌아가셨습니다. 그 옛날에 어른이셨던 그 자리가 이제 우리 세대가 그 나이가 되었는데 정말 선배님들이 활동하신 만큼 선배님들이 자리를 지켜 주셨던 만큼 우리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조금 두려운 생각도 듭니다.

[앵커]
구봉서 선생님은 별명이 막둥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어떻게 해서 붙여진 별명이죠?

[인터뷰]
그게 제가 알기로는 영화 오부자에 출연할 때 그때 막둥이 역할로 출연한 뒤부터 막둥이 구봉서라는 별명이 붙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리고 볼 한쪽이 사탕 문 것처럼 보여서 많은 분들이 그 모습을 따라하기도 했었고 그리고 또 영화에도 얼마나 많은 영화에 출연하셨습니까?

그리고 영화로 인해서 상도 많이 받았고. 수학여행이라는 영화가 또 대표적인 영화이기도 한데 정말 어려웠던 시절에 우리 아버지 때서부터 많은 웃음을 주셨던 그런 분이셨기에 말씀드리면서도 계속 마음이 아프고 떨리네요.

[앵커]
저도 기억이 나는데 80년대 중반까지 텔레비전에서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거든요. 그런데 후배로서 구봉서 선생을 봤을 때 코미디 연기, 어떤 부분이 후배들한테 귀감이 됐고 끝으로 우리 앞으로의 코미디계의 발전을 위해서 구봉서 선생님의 별세를 계기로 어떤 말씀을 해 주고 싶으십니까?

[인터뷰]
서민들의 마음을, 모든 것들을 대변해 주는 코미디언이 아니셨나 싶습니다. 언제나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그 웃음들이 억지웃음이 아닌 그런 웃음들이 많은 분들이 공감을 하고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연기뿐만 아니라 제가 91년도에 일본 갈 때는 저를 불러서 두 손을 꼭 잡고, 장로님이셨으니까. 개인적으로 기도도 해 주시고….

그러니까 바른 생활을 하지 않는 후배들을 야단을 많이 치셨어요. 많이 치셨고 또 억지웃음을 강요하지 않는 그런 코미디 연기를 많이 지도를 해 주셨고. 그런 것들이 우리가 선배님들이 매일 이렇게 불러서 이건 이렇게 해라, 저건 저렇게 해라 해서만이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선배님들이 가는 뒷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배워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구 선생님의 가신 길들은 모든 후배들, 모든 국민이 그 모습을 지켜봤듯이 우리 모든 후배들은 더 자세히 지켜봤거든요. 길을 따라서 우리도 죽을 때까지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많은 국민들에게 웃음을 잃지 않게 해 주는 후배들이 되고 싶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빨리 빈소에 가셔서 유족들을 애도해 주시기 바라고요. 오늘 고맙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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