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지키고 4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잊혀진 영웅의 사연

나라지키고 4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잊혀진 영웅의 사연

2016.07.24. 오후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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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한국전쟁 당시 지게를 지고 무기와 식량을 날랐던 '지게부대'를 아시나요?

군번, 계급장 하나 없던 이들은 현재 참전 사실을 인정받기가 매우 어려운데요.

바로 '비군인 참전인'이기 때문입니다.

박조은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사]
강원도 춘천시의 한 마을. 좁은 골목길 끝에 유난히 눈에 띄는 집 하나가 있습니다.

오늘 신문고의 주인공, 조두표 할아버지입니다.

댁에 들어서자, 거실 벽엔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아낀다는 하얀 제복이 걸려있는데요.

[기자 : 이건 왜 걸어 놓으셨어요?]

[조두표 : 미국의 밥 존슨이란 사람하고 척 이란 사람하고 다 같이 만들어 준 옷이에요. 하지만 내 신세 많이 졌죠. 그 사람들도.]

'한국전쟁 참전자 모임'.

그러고 보니, 벌써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을생 : 이렇게 안 뚱뚱했어요. 키도 크고. 인물도 잘생기고.]

올해 여든여섯 살.

긴 세월의 풍파 속에서 때론 많은 기억을 흘려보내며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열일곱 살 소년 조두표가 겪어내야 했던 전쟁의 참상은 손금처럼 몸에 깊이 새겨져 지우려고 해도 쉬이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난 해.

할아버지는 고향 함경도를 떠나 목숨을 건 피난길에 올랐고, 그 길에 인천 부두에서 노무자를 모집한단 광고를 보았습니다.

[조두표 : 거기 가서 근무한다고 했거든? 그런데 거기 가니까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허허벌판이죠!]

그곳에서 다시 미군 트럭에 태워져 도착한 곳은, 지금의 경기도 연천, 미1기갑사단 보병 대대였습니다.

당시 그곳은, 유엔군과 중공군이 맞붙던 최전방, 그러니까 한국전쟁의 한 복판이었습니다.

[조두표 : 중공 놈들이 들어오면 몇 시에 들어오느냐면 한 시에 들어와요. 새벽 1시부터 전투가 시작돼서 오전 4시면 꽹과리 막 친다고. 그럼 쑥 가버린다고 한참 가버려요.]

산 고지대에선 매일 밤 미군과 중공군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할아버지를 포함해 50여 명 노무자에게 주어진 일은, 중공군의 눈을 피해 전장인 고지대로 각종 전쟁 물자를 운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조두표 : 탄환 박격포 폭탄 또 가시 철망, 그리고 아침에 올라갈 적엔 거기서 또 밑에서 밥 해준 것도 가지고 올라가는데 6월에 비도 줄줄 오는데 그걸 매고 올라가니까 참 뒤는 뜨겁고 땀은 나고 그런 고생을 했어요. 미군이 'take this one' 하면 그냥 매고 올라가는 거지.]

[기자 : 서로 의사소통은 어떻게 하셨어요?]

[조두표 : 그게 의사소통이지 뭐. 'OK~' 하고 올라가는 거지 뭐.]

깊은 밤 산에서 다시 내려올 때는, 미군사상자, 또는 적군 포로들이 할아버지 지게에 실렸습니다.

[조두표 : 팔 떨어진 사람. 다리 없는 사람 별 사람 많죠. 피 냄새나죠, 참 힘들더라고.]

전투가 격렬해지면, 직접 총을 들고 전쟁에 뛰어든 적도 있었고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때쯤, 알게 됐습니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군인들과 같이 목숨을 걸고 일했어도, 노무자였던 할아버지가 전쟁에 참전했다는 걸 증명할 '군번'이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하지만 군번이 없다는 것이 할아버지 인생의 큰 걸림돌이 될 거란 사실을 그땐 알지 못했습니다.

[조두표 : 의무관이 둘이 와서 군번 내놓으라고 하더라고. 나 군번 없다고. 그래서 어떻게 왔느냐고. 우리 노무자라고 노무자로 일하다가 파편에 맞아서 온 거라고.]

전쟁이 끝나고 1972년, 할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식당 설거지, 웨이터, 요리사... 안 해본 일 없이 살아온 것이 벌써 40여 년 세월입니다.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살 땐, 아주 반가운 사람들도 만났는데요.

하얀 제복에 소총을 치켜들고 나란히 서 있는 백전노장들.

피부 색깔은 다 다르지만, 모두 6.25 전쟁 참전 용사들입니다.

할아버지는 올랜도 한국전쟁 참전자 모임의, 유일한 한국인이었습니다.

[조두표 : (모임에) 한국 사람들 많이 오라고 연락해주는 일 하고, (미국인들이) 애국가 그런 것 잘 못 부를 때는 내가 가르쳐 주고.]

[한을생 : 미국에서는 되게 알아줘요.]

[기자 : 어떤 점이요?]

[조두표 : 앞에 국기도 매고 나갈 때도 있고 총도 메고 나갈 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인정을 많이 해줘요.]

그리고 지난 2014년, 겁이 없고, 키가 컸던, 그리고 잘생겼던 17살 전쟁터의 지게 소년이 백발이 성성한 여든 노인이 돼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이런 보조 기구 없인 걷기도 힘들고요.

기력도 많이 쇠했지만요, 40년을 돌아 다시 안긴 조국의 품이 너무도 좋다고 말합니다.

[기자 : 40년 만에 오니까 뭐가 제일 바뀌었어요?]

[조두표 : 집, 뭐 전부 다 바뀌었죠. 뭐. 옛날에 길바닥에 아파트가 들어섰는데요. 춘천 역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때. 그런데 지금은 제일 크잖아요.]

할아버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조두표 : 뿌듯한 기분이 들죠. 후회 안 하죠. 그게 내가 조그만 힘이겠지만 이렇게 잘 되니까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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