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기 없는 적금 '경조사비'...부조 아닌 부담?

만기 없는 적금 '경조사비'...부조 아닌 부담?

2016.07.02. 오전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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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기쁨은 함께하고 슬픔은 나누는 우리의 전통, 경조사.

하지만 경조사비에 대한 부담이 늘면서 그 의미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광연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사]
직장인 이동민 씨의 달력은 평일보다 주말이 더 빽빽합니다.

지인들의 경조사를 잊지 않기 위해 바로바로 기록을 해두기 때문인데요.

이달에만 결혼식이 4건. 심지어 예식이 겹치는 날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경사스러운 그 날, 하지만 초대받은 입장에서는 말 못할 속사정이 있습니다.

[이동민 : 부담이 좀 되죠 제가 쓸 수 있는 현금의 부분이 (한정돼) 있는데 그걸 오버하게 되면 다음 달이나 다다음 달에 (쓸) 금액을 당겨서 미리 쓴다거나 솔직히 부담이 아니라고 얘기할 순 없죠.]

그래도 불러준 성의를 생각해 되도록 참석을 하는 편이지만 가끔 난처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동민 : 졸업한 지도 오래됐고 한동안 꽤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가 (경조사) 연락을 받는 경우에는 좀 당황스러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정성이라도 보태고자 노력하는 이 씨.

몇 해 전 어머니 상을 치르면서 그 중요성을 몸소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동민 :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움을 받았던 경험들이 되게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요 그래서 경사보다는 조사 쪽에 많이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초대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스러운 경조사.

그러나 최근 이 씨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결혼 5년 만에 얻은 예쁜 딸의 첫 생일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동민 : 주변에서는 아이 생겼으니까 돌잔치 할 때 꼭 연락하라고 얘기하는데 그런 부담까지 드리게 된다면 제 마음 자체가 편하지 않을 것 같아서 저희는 그냥 가족끼리만 식사하는 정도로만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한 취업포털사이트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직장인은 한 달 평균 1.8회 경조사에 참석한다고 답했습니다.

또 봉투에 5만 원을 넣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10만 원, 7만 원, 3만 원 순으로 경조사 한 건당 평균 65,600원을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경조사비에 대한 고민은 비단 직장인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자영업을 하다가 은퇴를 하고 노후를 보내고 있는 박찬기 씨.

여든의 나이를 바라보는 그에게는 고이고이 간직해 온 특별한 장부가 있는데요.

손수 챙긴 가까운 친인척과 친구, 회사 동료의 경조사가 빼곡하게 기록돼있습니다.

[박찬기 : 나도 언젠가는 돌아올 거 아니냐 (자녀) 결혼시킬 때가 경사가 돌아올 때 내가 이걸 보고 나도 보내야 할 거 아니냐.]

[기자 : 정말 경조사를 많이 챙기시는 편이네요.]

[박찬기 : 아이 뭐 수도 없죠.]

40년 세월 속에 빛바랜 종이를 넘기다 보면 경조사비의 역사가 한눈에 보이는데요.

[박찬기 : 이게 95년도 큰아들 (결혼식) 방명록입니다 그때 당시 받은 돈이에요 3만 원이잖아요 2만 원도 더러 있잖아요.]

한창 사회생활을 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세상이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그때는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가끔 후회도 됩니다.

[박찬기 : 노후 생활 적금이라든가 말하자면 연금 저축이라든가 이런 거로 넣어서 이거(경조사) 다 무시해버리고 거의 무시하고 그런 놈 이 공을 들였으면 아파트 몇 채예요. 거짓말 아니라.]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상호부조’의 문화는 현업에서 물러난 이들에게 ‘상호부담’이 되기도 하는데요.

우리의 풍습을 미덕으로 여겨 온 어르신들은 이웃의 경조사를 쉽게 모르는 척할 수도 없습니다.

[권오경 : (청첩장을) 최고 (많이) 받은 게 열 몇 장까지 받아봤어 그 날 하루. 부담은 물론 되지만 내가 안 갈 수도 없고나도 그사이에 받아먹고 했으니까 체면이 있으니까 가서 내고 이렇게 지내는 거잖아요.]

하지만 손님을 부르는 입장이 되면 마음 상하는 일도 더러 있습니다.

[고중곤 : 섭섭한 적은 있기는 있지 나는 갔는데 그 상대가 이제 안 왔을 때 그럴 때는 좀 섭섭하기도 하고.]

또 수입이 한정된 은퇴자에게 경조사비는 부담일 수밖에 없습니다.

축하해주는 마음으로 자리를 찾았다가 씁쓸함만 안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만희 : 나이 먹은 사람으로서는 솔직히 (돈) 나오는 데 없다 그래도 과언이 아닌데 호텔 가서 식대가 8만 원짜리다 7만 원짜리다 할 때는 나도 모르게 비상금 꺼내서 10만 원 내놓게 되더라고.]

실제로 국민연금 100만 원 이상을 받는 사람들의 가계부를 살펴보니 경조사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16%에 달했습니다.

이는 노후 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의료비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입니다.

기쁜 일에 함께 웃고 슬픈 일은 서로 돕던 우리나라의 경조사 문화.

그 아름다운 전통의 의미가 아쉬운 요즘입니다.

[조명석 : 단출하게 해야지 이게 지금 결혼 한 번 시키고 나면 누구 말대로 갈빗대가 휘청하는 거예요.]

[이만희 : 대들보가 나가지 대들보가. 옛날에는 국수 잔치했잖아요. 그래가지고 국수 한 그릇 얻어먹고 이렇게 인사로 국수 하나 먹고 또 수건이나 타월 같은 거 나눠주고 상품 이렇게 해서 한 것이 조촐한 것이 옛날이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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