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 털어 제자 학비 마련 '엄마 같은 선생님'

박봉 털어 제자 학비 마련 '엄마 같은 선생님'

2016.05.12. 오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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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순련, 전 국산초교 교장 (5월의 스승)

[앵커]
이제 사흘 뒤면 스승의 날입니다. 저희가 5월의 스승으로 교육부에서 선정된 엄마 같은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교직 37년 동안 거제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셨고 또 다문화가정, 결혼이주 여성의 스승 역할을 하셨습니다. 만나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반갑습니다.

[앵커]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멀리서 오셨다고요?

[인터뷰]
거제도에서 왔습니다. 새벽 5시 버스를 타고 왔습니다.

[앵커]
원순련 선생님. 5월의 스승으로 교육부에서 선정되셨고. 아마 상금도 받을 셨을 텐데 지금까지 그런 상을 몇 번 받으셨는데 그 상금은 다 제자들 또는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다 쓰셨다고요?

[인터뷰]
당연히 그 상금은 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99년도에 유재라봉사상으로 500만 원을 받은 것을 섬 두 아이에게 학자금으로 주고 그 다음에 2009년도에는 교육부와 조선일보에서 올해의 스승상으로 받은 1000만 원은 돈을 조금 더 보태서 이주민 여성들의 친정에 6가정을 보냈습니다.

[앵커]
친정에 갈 돈이 없으니까, 가기 어려우니까. 얼마나 가고 싶을 텐데 갈 수가 없으니까 그걸로 보내주셨군요. 그때 이주 여성들의 선생님 역할을 하셨을 때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그래도 선생님도 옷도 좀 좋은 것 한번 사 입고 싶기도 하고 쓰시고 싶은 곳도 있었을 텐데 그냥 선뜻 그렇게 결정이 되시던가요?

[인터뷰]
이주민 여성들이 당한 게 제 나이대쯤 저희 친구들이 모두 독일로 갔었거든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7, 8년 동안이나 친정을 못 갔어요. 그래서 그냥 제가 도움을 주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한 겁니다.

[앵커]
굉장히 젊어 보이시는데 벌써 퇴직도 하셨고 친구분들이 그때, 그 나이때쯤에 독일로 그때 간호사로 가신 건가 보죠?

[인터뷰]
그렇죠.

[앵커]
그런 경험이 있으신거군요. 선생님이 되시기로 어떻게 해서 결정을 하신 겁니까?

[인터뷰]
제가 학교다닐 때 많이 아픈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담임 선생님이 일주일을 저를 데리고 자면서 죽을 끓여주기도 하고 그리고 또 제가 어려운 학교생활을 했는데 친구들 몰래 저에게 학비를 조금씩 보태준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어요. 그래서 저도 우리 담임선생님 같은 선생님이 되어야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앵커]
그게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 그런 겁니까?

[인터뷰]
아니요, 중학교 때였습니다.

[앵커]
그런 선생님들이 많군요.

[인터뷰]
네, 많습니다.

[앵커]
그 이야기만 들어도 눈물이 날 것 같은데요. 그 선생님들의 사랑이 결국 또 좋은 선생님을 만든 것이군요.

[인터뷰]
제가 좋은 선생님이 아니라 지금 교육현장에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다 좋은 선생님이에요.

[앵커]
그렇군요. 선생님이 되시고 싶었는데 교대에 합격했는데 누가 축하해 주는 사람도 없고 등록금을 마련해 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사흘인가를 그냥 방에서 우셨다고요?

[인터뷰]
3일을 밥을 굶고 단식을 해도 아무도 등록금을 못 주더라고요. 그런데 3일이 지나니까 대학이 눈에 안 보이고 밥이 눈에 보였어요. 그래서 방송통신대학을 가서 준교사 자격을 받고 학교로 왔기 때문에 저는 하느님께 감사하고 대한민국에 정말 감사드려요. 저에게 이런 귀한 일을 주셨기 때문에.

[앵커]
그래서 7년 동안을 동생들 뒷바라지 하면서 학비 대주시고 그러다가 방통대에 들어가셔서 뒤늦게 교사의 꿈을 이루셨습니다. 그 뒤로 늘 만족하셨습니까, 선생님이 되신 것에?

[인터뷰]
네. 한 번도 학교에 와서 후회한 적이 없고 오히려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앵커]
늘 만족하고 늘 감사하셨군요.

[인터뷰]
네.

[앵커]
그래도 말을 안 듣는 학생도 있을 테고 내가 사랑해 줬는데 그 길로 잘 안 가는 제자들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속상하지 않았나요?

[인터뷰]
그래서 선생님이 있는 것 아닐까요? 아이들이 다 선생님 말씀만 잘 듣는다면 누구나 선생님을 할 겁니다. 그래서 그런 말 안 듣는 아이, 힘든 아이를 제대로 가도록 하는 게 선생님이 아닐까요. 대한민국의 선생님들은 모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앵커]
그러면 어떻게 하십니까, 말 안 듣는 아이들, 엇나간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인터뷰]
저는 교사는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지적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우선 내 제자에게 감화를 줄 수 있는 그런 감화 능력자가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담임 선생님이 제자에게 정말 정성을 보이면 아이는 분명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앵커] 학생들이 어떨 때 선생님이 나한테 정성을 쏟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느낍니까?

[인터뷰]
사실 학교에 있다보면 혼낼 수도 있고 그렇잖아요. 저는 많이 그렇게 했거든요. 그리고는 매일 일기장에 내가 그렇게 혼을 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 그다음에 그렇지만 네가 잘 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1년 내내 일기장 지도를 통해서 했습니다. 그러면 다음 날 되면 아이들이 그런 마음이 다 없어져요.

[앵커]
그러니까 아이들이 일기를 써 오게 해서 그 일기장을 보시고 그걸 가지고 또 대화를 나누시고 그렇게 하셨군요. 칭찬 격력을 해 주는 것도 중요한가요?

[인터뷰]
그렇죠. 우리가 칭찬을 먹고 자란 아이와 다르잖아요. 제가 중학교 때 한번 숙제를 냈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써주었어요. 너는 떡잎이 튼튼하니 틀림없이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저는 그 말을 가슴에 담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희 반 아이들에게도 그런 축복하는 글을 많이 적어주었거든요. 그게 아이들에게 큰 힘이 된 것 같고 또 졸업하고 나도 그 이야기를 저에게 많이 전해요.

[앵커]
선생님이 15살, 중학생 때 들었던 너는 떡잎이 튼튼하니까, 그 말을 50년 지났는데도 그것을 기억하고 계시는 거군요?

[인터뷰]
어떤 선생님이 해 주셨는지도 다 압니다.

[앵커]
아마 선생님이 일기장에 쓰셨던 그 이야기들도 그 제자들에게 그렇게 다 남아 있겠죠.

[인터뷰]
그러기를 바랍니다.

[앵커]
선생님 제자 한 분이 쓴 편지를 제가 봤는데요. 저에게 선생님은 부모님이었다고 하는 그 편지 잠깐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저에게 선생님은 부모님이었어요.

79년 제자였던 김주옥 씨가 쓰신 건데요. 늘 헌옷만 입고 치마는 입어보지도 못했는데 제 일기장을 보셨는지 선생님이 원피스를 구해 주셔서 처음 치마를 입은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어떤 사연입니까, 이게?

[인터뷰]
이렇게 이름을 밝히고 그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마 인터뷰를 통해서 안 것 같은데 아주 힘든 친구였어요. 그런데 그게 그 힘든 가정 그런 것들은 말하고 싶지가 않고 그 과정에서도 잘 성장을 해서 지금은 그런 어려움을 겪는 학부모와 학생들을 상담해 주는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어요. 그런데 참 어려웠어요, 그 친구가. 그런 친구가 반듯하게 자라준 그게 중요한 거예요.

[앵커]
그래서 원피스를 선물로 주셨나 보죠?

[인터뷰]
네. 원피스를 선물로 주기도 하고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못 가고 이럴 때에도 집으로 찾아와서 계속 연결이 되고 그렇게 했습니다.

[앵커]
아까 학비 계속 내주셨다는 제자 있지 않습니까, 3년 동안. 그 제자도 지금도 연락합니까?

[인터뷰]
아니요, 지금은 연락이 안 되는데. 학비를 제가 15명의 학생들을 고등학교 전액 학비를 댔어요. 그렇게 한 이유는 제가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중의 5년은 학교장학금을 받았어요.

1년은 유한양행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고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오게 된 거예요. 당연히 제가 받았기 때문에 갚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눈에 띄는 그런 어려운 제자들을 15명을 졸업을 시키고 지금 또 2명을 하고 있고. 저처럼 등록금이 없어 대학을 못 가는 아이 3명에게 입학 등록금을 주었습니다.

[앵커]
선생님이 정년퇴임하시는 날 제자들이 찾아와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상을 만들어서 드렸다면서요?

[인터뷰]
이건 좀 자랑해도 되겠습니까?

[앵커]
저희가 가지고와주십사 부탁 드렸습니다.

[인터뷰]
이것인데요. 제가 교대를 나오지 않고 통신대학을 나왔기 때문에.사실은 제가 지도를 하는 데 시행착오를 많이 한 아이들이 이 아이들이에요. 그런데 3학년 때 만난 아이들은 그때 학교 사정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3, 4, 5, 6학년, 4년을 제가 담임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이들을 참 잘못 지도를 한 게 많은 아이들인데 이 아이들이 저에게 졸업하는 날에 13명이 전국에서 모여서 이 상을 줬거든요. 제가 상을 많이 받았지만 이 상이 제일 훌륭한 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앵커]
제자들이 전국에서 모여서 이 상을 직접 만들어 와서 83년 제7회 장평초등학교 제자 일동, 이렇게 되어 있군요. 코흘림을 훌쩍거리던 저희의 선생님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가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열정과 베푸신 사랑 많은 제자들에게 귀감이 되어 주셔서 저희는 자랑스럽습니다. 평생 제자들 양성과 미래 교육를 위하여 헌신한 힘이 크므로 저희 첫 제자들이 이 상을 수여합니다라고 돼 있습니다.

[인터뷰]
제가 참 행복하겠죠?

[앵커]
정말 행복하실 것 같습니다. 가보군요, 가보.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선생님이 결혼이주여성들 가르치시면서 한글도 가르치시고 우리 문화도 가르치시고. 그래서 그것도 제가 잠깐 봤는데. 이게 두 개인데요. 그러니까 하나는 처음 왔을 때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의 글이고 그 옆에는 배운 다음의 글인데. 지금 보시는 것이 처음이죠? 이게 처음 배우기 시작할 때쯤.

[인터뷰]
그런데 이게 처음은 이렇게도 못 썼어요. 처음에는 도대체 글을 가르칠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 세 달은 놀이하고 놀았습니다.

[앵커]
세 달은 그냥 놀아주시고.

[인터뷰]
글이 전혀 안 됐거든요, 그때는. 그러다가 한 1년 지나서부터 저렇게 글이 되기 시작했는데 제가 정확하게 만 6년이니까 8년 정도를 햇수로 치면 그렇게 하니까 일기, 편지 그다음에 생활문, 시 쓰기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글을 지방신문에다 게재를 함으로써 이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어떻게 특히 생각하고 있는 목소리를 들려주는 데 노력을 했습니다.

[앵커]
이 특별한 제자들, 외국인 제자들도 선생님을 가끔 찾아오고 그럽니까?

[인터뷰]
네. 그때 33명으로 시작을 했거든요. 그런데 중간에 오다가 아이를 낳거나 또 경제적으로 일을 해야만 가정을 영위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점차 빠지고 12명만 지금까지도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앵커]
사흘 뒤면 스승의 날인데요. 선생님의 스승께 한 말씀 드려도 좋고 아니면 지금 후배 교사들한테 하시고 싶은 말씀도 좋고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해 주세요.

[인터뷰]
제가 이 상을 받으면서 제일 부끄럽고 미안한 게 제가 가르친 우리반 아이들이었어요. 제가 정말 실수를 한 부분이 많은데. 이걸 내가 받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또 대한민국에는 정말 소리 없이 최선을 다하는 선생님들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제가 이런 상을 받는다는 것도 미안한 일인데 선생님은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그런 기둥을 세우는 역할을 하는 분이 교사입니다. 그래서 전국의 선생님들이 정말 자긍심을 가지고 열정과 책임을 다해 주시면 우리나라의 앞날은 밝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고 제가 이 자리에서 우리 학부모님들께도 한말씀 하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저는 사실 교대를 못 나왔기 때문에 아이들을 어떻게 지도를 하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제가 만난 학부모님들은 그런 저를 격려하고 잘한다고. 그래서 제가 그런 줄 알고 행복하게 교사생활을 했거든요.

그래서 우리 학부모님들께서 부모님 다음으로 아이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교사예요. 그래서 선생님을 믿고 신뢰하고 선생님 어깨에 힘을 실어주신다면 그런 학부모님의 모습이 자기 자녀에게 그대로 보여질 것이고 그런 자녀들이 선생님을 틀림없이 존경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제가 전국에 많은 제자들을 대표할 자격은 없지만 이 자리에서만큼은 대표해서 전국에 모든 선생님들을 대표하신 원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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