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한국사회 키워드] 울림 없는 메아리 '가습기'

[2016 한국사회 키워드] 울림 없는 메아리 '가습기'

2016.05.02. 오전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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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가습기 살균제 수사에서 제조사인 옥시 측이 위해성을 미리 알았을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데도 당시에는 몰랐다며 발뺌입니다.

정부 역시 위험성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축소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불거졌습니다.

피해자 대책에 미온적인 태도로 5년이 흘렀고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자 이제야 뒤늦게 소비자에게 사과했습니다.

YTN 연중기획 '2016 한국사회 키워드' 열한 번째는 '울림 없는 메아리'가 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봤습니다.

박서경 기자입니다.

[기자]
기적처럼 살아난 몇 안 되는 아이 가운데 한 명인 13살 성준이.

미술 심리치료 때 친구들 목은 그리지 않습니다.

생후 14개월부터 목에 산소통을 달고 살아온 사실을 잊고 싶기 때문입니다.

목에 뚫린 구멍 때문에 소리를 낼 수도 없었던 아들을 생각하면 엄마는 가슴이 미어집니다.

[권미애 / 2004년 발병 어린이 어머니 : 크리스마스이브라 간단하게 파티를 했는데, (그때 찍은) 가족사진 안에 그게 찍혀있더라고요. 그 안에 웃고 있는 제 모습을 보고서는 내가 아이를 저렇게 만들었는데 웃고 있다니 화가 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 살배기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

가장이라는 이유로 집에서는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합니다.

가슴 속에 늘 지니고 다니는 아이 사진을 꺼내며 그동안 묻어둔 끔찍했던 지난날을 떠올려봅니다.

[피해자 / 2007년 숨진 아기 아버지 : 제가 죄인이죠. 제가 사서 열심히 넣었으니까. 99.9% 안전하다고 써놨으니 그걸 믿고 샀죠. 그런데 결국 그것 때문에 아이가….]

유해물질 PHMG가 들어간 가습기 살균제는 판매 중지되기 전까지 10년이나 팔렸습니다.

5백만 명이 사용했는데 피해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221명에 불과합니다.

이 가운데 이미 백 명 가까운 사람이 숨졌습니다.

최근 검찰이 수사를 확대하고서야 문제가 공론화됐습니다.

연구 실험 결과를 조작했을 가능성도 등장하면서 관련자들이 줄줄이 소환됐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낳은 옥시는 침묵 5년 만에 이메일 사과문을 배포했습니다.

홍보대행사를 통해 남긴 몇백 자짜리 사과문에 피해자들은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영국 본사도 그동안 판매는 한국지사에서 해왔다며 무관하다는 입장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집단 소송이 준비되고 있지만 기업의 '고의성'을 밝히기는 쉽지 않아 기나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1982년 타이레놀 사건 때 존슨앤드존슨은 옥시와는 달랐습니다.

당시 청산가리가 든 타이레놀을 먹고 7명이 사망하자, 회사는 곳곳에 풀린 3천백만 병을 회수하고 폐기했습니다.

재발 방지 포장법을 개발할 때까지 물건 판매를 중단하고 제조과정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허가와 제조, 유통과정에서 허점을 보인 정부도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일정 안전규격만 맞추면 제품을 출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통일된 관리 부서가 없어 제조업체도 어디에서 무슨 허가를 받아야 할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종현 / 보건복지부 폐손상위원회 연구원 :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에는 살균 제품이 시장에 출시되려면 사전에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그런 법이 없었고요. ]

문제가 불거진 지 5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제조사의 사과에는 진정성이 없고 정부 역시 부실했던 대응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분노와 억울함이 해소되지 않는 피해자들은 지금까지처럼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YTN 박서경[psk@ytn.co.k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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