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이트의 기능을 모두 활용하기 위해서는 자바스크립트를 활성화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브라우저에서 자바스크립트를 활성화하는 방법을 참고 하세요.

주요뉴스
    [김주환의 안보이야기–5] 북한에 시민사회가 형성될 수 있을까요?
    [김주환의 안보이야기–5] 북한에 시민사회가 형성될 수 있을까요?
    ◆ 에피소드 1
    냉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한 사내가 전단을 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KGB 요원은 화들짝 놀랐고, 그 사내를 체포했다. 그런데 그 사내가 뿌린 전단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그냥 흰 종이었다.

    ◆ 에피소드 2
    역시, 모스크바 붉은 광장. 한 사내가 매대(북한식 노점상)를 펼쳐놓고, 잡동사니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개인이 물건을 파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었던 시기라 역시 놀란 KGB 요원이 그 남자를 체포했다. 그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매대 앞부분에 적힌 글귀를 읽어보라고 했다. 글귀 내용: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위의 두 남자가 체포됐을까요? 체포됐다면 어떤 죄목이었을까요? 이후 처리 과정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이런 웃지못할 상황은 배급제를 원칙으로 했던 공산주의의 기본 개념이 붕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겪은 북한은 2002년 ‘7·1 조치’(부분적인 배급제 폐지)에 이어 2004년 ‘3·1 조치’를 통해 그동안 국정 가격으로 사게 했던 50%의 분량마저 개인이 직접 조달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적용대상이 일반 주민뿐 아니라 ‘모든 기관, 기업소, 개인’을 포함한 것이어서 식량 배급제를 중단한 겁니다. 물론 그사이 북한 주민들은 각자 생존하기 위해 ‘장마당’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주민이 식량난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직장을 이탈하여 장사 등을 통해 살 길을 모색하는 등 경제가 국가의 계획적 통제에 의해 작동되지 않고 주민도 소비를 전적으로 시장에 의존하는, 그러니까 북한식 사회주의 경제이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발생했습니다. 북한 당국을 믿지 못하겠다는 거죠.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적 경제영역(시장)이 확대됐음에도 불구하고, 세수(稅收)는 여전히 부족해 북한 당국의 재정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중국과 같이 개혁을 통한 민간 분야의 활력 증대 → 세수 증가 → 정부 재정으로 사회인프라 확충 → 민간분야 생산성 향상 → 경제성장을 통한 세수 증가와 같은 선순환 고리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오히려 북한은 세수 부족으로 인한 정부 재정의 항상적인 압박 → 화폐발행 증대를 통한 재정 보완 → 악화되는 인플레이션 → 민간 분야의 활력 저하와 같은 악순환이 나타났습니다.

    북한의 고난의 행군 기간이었던 지난 1996년 당시 한미연합사의 국제관계 담당관이었던 로버트 콜린스(Robert Collins) 박사가 『북한 붕괴 7단계』 시나리오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①‘자원고갈-②(자원투입의) 우선 순위화-③국지적 독자노선-④탄압-⑤저항-⑥분열-⑦정권교체’의 순서로 이어진다는 내용입니다.

    우선, 북한 내에 식량 등의 자원이 부족해지면 정권은 자원을 우선순위에 따라 배분합니다. 군대나 평양시민 등 체제유지에 필요한 세력에게만 자원을 공급하는 것. 여기서 소외된 세력은 시장거래 등 독자적 생존 노선을 채택한다. 정권은 이 생존노선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탄압을 시작합니다. 4단계(탄압)가 성공하면 정권은 당분간 유지되지만, 실패하면 주민들의 조직적인 저항이 일어나 5단계(저항)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당시 콜린스 박사는 북한이 2∼4단계를 통과하고 있었다고 전망한 적이 있습니다. 일부 대북전문가는 북한이 5단계 상황을 지나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콜린스가 만든 5단계(저항)에서 나타나는 징조들의 목록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죠. ① (시장세력 등이) 당국의 지시를 거부한다. ② 정권의 하부기관이 재산을 횡령한다는 내용 등이 있습니다. 장마당 세대의 불평불만, 북한 고위층에 있던 인사들이 돈을 갖고 탈북 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하겠죠.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스카치폴(Theda Skocpol)도 국가의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회로부터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추출능력(extractive capacity). 둘째, 사회경제적 발전을 조정ㆍ관리할 수 있는 조정능력(steering capacity). 셋째, 합의를 하거나 상징을 통해 지배할 수 있는 정당화 능력(legitimation capacity). 넷째, 무력의 사용 또는 위협을 통해 지배할 수 있는 강제능력(coercive capacity)이 있어야 하는데 북한은 ‘사회로부터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추출 능력’이 없다는 거죠. 이런 점에서 북한 내 주요 생필품 공급을 담당하는 것은 장마당이지 북한 당국이 아닌 것이 분명한 셈이죠.

    이런 장마당이 북한 전역에 4백여 곳이나 된다고 합니다. 함경북도 청진시의 경우, 6개의 커다란 장마당이 있는데 비록 노점상 수준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점포에 해당하는 ‘매대’가 3만여 개 이상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각 매대 상인이 3~4명의 가족을 부양한다고 가정하면, 청진시 인구 62만 명 가운데 20% 정도가 장마당을 기반으로 생존하고 있다는 계산이 가능합니다. 이렇듯, 북한 주민들을 위한 생활경제가 장마당을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장마당을 중심으로 생겨난 신흥 재력가나 돈주 등 이른바 ‘북한판 붉은 자본가’는 물론 아파트 매매를 중개하는 브로커 등 이색 직업들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북한 당국이 인민생활 보장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막강한 재력과 네트워크를 동원해 스스로를 조직적으로 보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북한에는 당이 2개가 있다. 하나는 북한 노동당, 나머지 하나는 장마당이다. 노동당이 정책을 내놓으면 장마당에는 대책이 있다”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돈다고 합니다.

    이 장마당의 출연을 북한판 시민사회 형성의 초기 단계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는 지난 2016년 1월 발간한 『Asia-Pacific Rebalance 2025: Capabilities, Presence, and Partnerships』 에서 장마당은 단순히 필요한 물건을 사고파는 것뿐만 아니라 정보가 교환되고 소통이 이뤄진다는 점을 주목했습니다. 장마당이 갖는 여론 형성 과정이 장마당을 북한판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징후라고 봐야한다는 거죠. 앞서, 지난 2015년 4월 미국 카네기국제평화재단(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역시 『Conflict and Cooperation in the Asia-Pacific Region: A Strategic Net Assessment』라는 보고서에서 장마당은 북한 내부와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라고 평가했습니다.

    사실 장마당이라는 시장이 생기기 전까지는 북한 주민들은 ‘충성의 가치’가 가장 우선시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장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물질의 가치’를 알게 됐고, 이런 가치관의 변화가 김정은 체제의 이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1980~1990년대에 북한에서 태어난 20~30대 청년 세대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고 합니다. 이들을 장마당 세대라고 하는데, 국가정보원도 ‘돈벌이에 관심이 많고 부모 세대에 비해 북한 체제에 대한 충성도가 낮은 세대’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체제이완 현상에 깜짝 놀랐는지 북한 당국은 지난 2015년 7월 25일 ‘전국노병대회’라는 것을 개최했습니다. 이날 채택한 호소문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미국놈들, 계급적 원수들의 본성은 우리 세대가 잘 안다... (중략) 원수의 본성이 변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우리의 정신, 증오와 복수심이 변할 수 있단 말인가?” 북한의 젊은 세대인 장마당 세대의 사상 무장과 각성을 촉구했다고 봐야 하겠죠. 북한에도 세대 간 갈등이 극심하다는 것이 탈북 인사들의 한결같은 이야기인데, 사실인가 봅니다.

    관건은 이 장마당 세대를 우리가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에 달려있겠죠. 일각에서는 김정은 등 북한 지도층을 대상으로 변해야 한다고 촉구할 것이 아니라, 장마당 세대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소통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북한 내부로 외부 세계의 정보 전파, 인권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홍보, 북한 내부 변화 유도 등 여러 방안이 있겠죠. 과거 동독 주민들이 서독 TV의 저녁 8시 뉴스를 통해 서독과 국제사회의 정보를 얻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야 북한 내부에 시민사회가 본격적으로 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지고, 그걸 바탕으로 북한 내부에서 레짐 체인지도 가능해지겠죠.

    [김주환의 안보이야기–5] 북한에 시민사회가 형성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