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파견 1세대에게 듣는 '제2의 중동 붐'

중동 파견 1세대에게 듣는 '제2의 중동 붐'

2015.03.27. 오후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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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최근에 제가 들은 말 중에서 제일 어처구는 없는 말이 한강의 기적, 포스코 이런 걸 다 일본이 지원해서 가능했었다는 일본이 그렇게 정부가 홍보를 하고 있다는 그 얘기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에서 불과 30, 40년 만에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이런 기적을 만든 건 우리 앞세대가 피와 땀과 눈물과 노력으로 만들어낸 일입니다.

이것을 일본이 자기들이 도와줘서 된 것이라고 말하니까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오늘 저희가 우리의 위대했던 앞세대 가운데 최근 현안이 되고 있는 중동붐을 만들었던 주역 한 분을 초대했습니다. 이분 제가 봤더니 책을 냈는데요. 3년 동안 파견 경험을 담은 예순 즈음에라는 책을 썼었고 중동에서 럭키건설사에서 근무했던 분입니다. 강신영 씨를 초대했습니다.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나비 넥타이가 잘 어울리세요. 원래 그렇게 매고 다니십니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인터뷰]
댄스스포츠를 하기 때문에요. 행사에는 늘 이렇게 다니거든요.

[앵커]
젊은 시절에는 중동에서 땀을 흘리시고 지금은 댄스스포츠로 제2의 인생을.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언제부터 언제까지 중동에 계셨나요?

[인터뷰]

제가 80년에 가서 83년도 그러니까 4년있었습니다.

[앵커]
4년 계셨군요. 중동에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인터뷰]
저는 영어를 좀 하는 덕분에 외자재를 구매하는 외자과에서 근무를 했었습니다.

[앵커]
럭키건설사에서요?

[인터뷰]
네.

[앵커]
전에는 보니까 미국은행에 계셨고 미국 국방부에서도 계셨다고 하던데 어떻게 가셨습니까?

[인터뷰]
건설업종이라는 게 매력이 있는 게 모든 업종에 있던 사람들을 다 흡수할 수 있는 업종입니다. 그래서 저같이 영어밖에 할 줄 모른다. 그러면 와서 외산자재 구매할 때 영어가 필요하니까 이리로 들어오라고 그래서 갔었습니다. 사내결혼을 하는 바람에 미국 은행에 더 같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앵커]
그래서 부인도 같이 가셨나요, 중동에?

[인터뷰]
아닙니다. 중동에서 그렇게 우리가 여유가 있을 때가 아니에요.

[앵커]
어땠습니까, 중동에서의 근무환경이나 여건이요?

[인터뷰]
여기서는 상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공항에 딱 내리니까 하늘은 뿌옇고 갑자기 열기가 확 느껴지는데 이거 여기에서 해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앵커]
사우디아라비아죠?

[인터뷰]
네.

[앵커]
기온이 얼마나 올라갑니까?

[인터뷰]
낮에는 한 50도 정도 올라갑니다. 차문은 그냥 열면 손이 다칩니다. 장갑으로 열거나 해야 됩니다. 문을 열어놓고 한참 있다가 타야 돼죠.

[앵커]
그러면 거기에서 하루종일 고열 속에서 근무를 하시나요?

[인터뷰]
저는 그래도 사무직이기 때문에 에어컨 틀어놓고 막사 같은 곳에서 일을 하고 그런데 현장근로자분들은 정말 고생이 많으셨죠.

[앵커]
그래도 그중에서도 편하셨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사무실에 계셨으니까요. 근로자들은 어떠셨습니까? 병이 걸리거나 아픈 분들이 있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는데요?

[인터뷰]
그게 정신적인 것 같아요. 아플 수 있지만 정신력으로 다 버티는 거죠. 거기에서 어디가 갑자기 아프다고 집에 갈 수도 없고 양호실 같은 데서 간단하게 치료를 받고 정 중한 병원이면 귀국을 했지만 귀국을 하면 다시 못 나오잖아요, 사우디에요.

그때는 사명감을 가지고 거기를 갔는데 거기에서 맥없이 물러나기에는 억울했죠.

[앵커]
국제시장을 보셨습니까?

[인터뷰]
네.

[앵커]
거기에는 파독 광부들의 얘기가 나오는데 여기도 열악하고 힘들었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영화가 거기에서 끝났기 때문에 그렇죠. 그후에 세대가... 그 후의 얘기죠?

[앵커]
속편에 나오면 혹시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제일 힘들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인터뷰]
제일 힘들었던 건 아무래도 장기간 나가 있으니까 향수병 같은 것이 있어요. 저는 어머니 임종도 못 지켰습니다.

신혼 때 나가서 자식들의 돌도 같이 못 보내고 딸을 낳았다고 하는데 얼굴도 알 수 없고 그럴 때 굉장히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앵커]
그때는 화상 통화도 없던 시절이고 사진을 보내주면 그것도 한창 걸려서 오면 참. 얼마나 보고싶었겠어요. 따님이. 나중에 몇 살 때 만나신 겁니까?

[인터뷰]
4년후이니까 물론 중간에 왔다 갔다 했습니다마는 나중에 다 끝내고 들어갔을 때 봤죠.

[앵커]
그때 그 따님이 우리 아빠인지 알아보던가요?

[인터뷰]
전혀 몰라봤습니다.

[앵커]
나중에 얼마나 걸립니까, 우리 아빠구나라고 알아보는데요.

[인터뷰]
그 후에 저는 독일에 1년 정도 더 있었기 때문에 정말 그때에서부터 서먹서먹해요, 지금까지요.

[앵커]
어머님 임종을 지키지 못했을 때 심정은 어떠셨나요?

[인터뷰]
그때는 정말 평생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법이 없었습니다.

[앵커]
건강관리 같은 것도 굉장히 중요했겠는데요. 하루종일 그렇게 뜨거운 열사 속에서 일하시니까 어떻게 하셨습니까?

[인터뷰]
글쎄요, 마음 편하게 먹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아무래도 덜 나는 것 같아요.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건강했고요.

[앵커]
거기 일하러 가신 근로자들께서는 어떤 마음과 어떤 사정들을 가지고 거기에 가신 것인가요?

[인터뷰]
일단 우리나라가 그 당시 석유파동을 겪고 해서 정말 외화가 없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가정적으로도 전부 아직 가난의 티를 벗지 못했을 때 중동바람이 분 거죠. 여기에 가면 국내보다 2.5정도 봉급을 더 탈 수 있고 그다음에 돈 쓸 때가 없었습니다.

[앵커]
돈 쓸 데가 아예 없습니까? 밤에 일이 끝나면 뭐합니까?

[인터뷰]
일도 늦게 끝났어요. 야간 작업이 많았고요. 다른 거 별로 생각할 수 없었고 사우디는 술도 없고 오락도 없어요.

[앵커]
술은 아예 안 파나요?

[인터뷰]
국법으로 거기에는 금지가 되어 있습니다.

[앵커]
외국인들에게도요?

[인터뷰]
네.

[앵커]
맥주 한잔도 못하고요?

[인터뷰]
안 됩니다. 알코올 없는 맥주는 있었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여가도 없고요.

[인터뷰]
영화관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앵커]
휴일에는 뭘 하셨나요?

[인터뷰]
잠이나 자던지 그거밖에 없죠.

[앵커]
요즘에 제2의 중동붐을 일으켜야 된다고 대통령이 계속 강조를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인터뷰]
정말 고맙죠. 우리가 가 있을 때 이 고생을 누가 알아줄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거기 나라는 우리나라보다 21배나 큰데 인구는 1600만명밖에 안 돼요.

그래서 보통 때는 사람을 구경할 수 없어요. 시내 나가야 조금 있고요. 사람이 없고요. 땅은 넓고 그러니까 노동력이 필요해서 우리 같은 사람이 나가는 겁니다. 우리는 취업난이라고 하는데 그런 데 일자리가 많이 생기면 정말 애국심을 가지고 일을 할 것 같아요.

[앵커]
어떤 분들은 우리 아래세대들은 우리처럼 고생을 시키지 말자고 그때 고생을 했던 건데 아래의 세대들도 중동에 가서 고생을 하면서 일해야 되는 거냐,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있거든요.

[인터뷰]
저는 고생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얘기를 우리는 많이 들었고요.

다 죽을 지경은 아닙니다. 일하는 보람도 생기고 거기에 따르는 보수도 있는 거고요. 나가서 해 볼만 합니다.

[앵커]
나가시면 거기에서 생활을 하시고 일 하시면서대한민국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하게 됩니까?

[인터뷰]
누구든지 애국자가 된다고 그러죠. 외국에 나가면 누구든지 애국자가 됩니다.

[앵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인터뷰]
우리나라가 부강해야 되겠다, 그리고 우리 때는 기술이 없어서 이제 단순 토목 정도로 몸으로 때우는 작업을 했죠. 보니까 거기에 부가가치 높은 걸 선진국이 빼먹더더라고요. 감리라든지 어떤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는...

[앵커]
그걸 우리가 해야 되는데요. 그렇죠?

[인터뷰]
우리가 그걸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세계에 꽤 이름난 건물들을 다 우리나라가 건설회사들이 하고 있죠.

[앵커]
그러니까 그때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군요. 중동붐이라도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지금은 육체적 노동보다는 기술적인 그런 면이 많기 때문에 훨씬 부가가치가 높죠.

[앵커]
중동에서도 그런 것들이 더 필요한 시대그것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그때 한국에 대해서 많이 이미지가 좋아졌습니까, 일하면서 만나고 하면서요?

[인터뷰]
사우디 사람들이 그때 우리를 볼 때는 지금 우리나라에 일하러 들어온 제3국 사람들 취급을 했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죠.

[앵커]
못사는 사람들이 왔구나 하면서.

[인터뷰]
돈벌러 왔다고 생각을 했는데 우리가 시내만 하더라도 왕궁에서부터 좌우로 들어서 있는 건물들이 다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이 지은 겁니다.

[앵커]
그 당시에도요?

[인터뷰]
네. 지하 밑 상수도, 하수도도 어느 건설사에서 하고 전기는 누가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했어요. 성실하게 그리고 차질없이요. 정말 열심히 일을 했거든요.

그것을 보고 지금은 한국사람들이 역시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 당시에 무시하던 시선에서 지금은 얼마 전에도 신문이 나지 않았습니까?

한국사람들 보고 싶다는 내용이요.

[앵커]
한국사람들이 보고 싶다고 신문에 났습니까?

[인터뷰]
네.

[앵커]
가끔 거기서 다시 한 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나요?

[인터뷰]
별로 그런 생각은 없어요. 거기는 정말 재미가 없어요.

[앵커]
군대 가 있던 곳에는 나중에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너무 힘드셔서요.

[인터뷰]
현지에는 술도 없지 오락시설도 없지 관광지도 없지 사실 별로 볼 것이 없습니다.

[앵커]
그래도 일할 맛 하다면서요?

[인터뷰]
일하러 가면 갈만 하죠.

[앵커]
아버님이 만약에 중동에 좋은 일자리가 있는데 나 가보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인터뷰]
당연히 가야 됩니다. 일자리가 있으면 가야죠.

[앵커]
음식은 어떻습니까?

[인터뷰]
음식은 요즘 할랄식품이다 해서 그런 얘기들이 부각이 됩니다마는 우리 때는 건설 현장에서 한식을 해 먹었어요. 그런데 돼지고기를 못 먹게 하죠. 제일 만만한 게 닭고기입니다.

닭고기는 하루에 3번 나옵니다. 그러면 한 3일만 멀면 식당 문만 열면 닭고기냄새가 나서 집에 가서 못먹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앵커]
지금은 닭고기를 잘 안 드십니까?

[인터뷰]
지금도 좋아합니다. 제가 4년이나 있었던 것은 그게 바로 비결입니다. 닭고기를 극복을 해야 된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계속 생각을 한거죠.

[앵커]
알겠습니다. 제가 모두에도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우리 윗세대들 이런 기적을 경제성장을 만든 그분들에 대한 마땅히 우리 아래세대들이 드려야 할 존경을, 제가 대표는 아니지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요.

[인터뷰]
고맙습니다.

[앵커]
현장 근로자들보다 편하다고는 하셨지만 얼마나 고생을 하셨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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