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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생존자 “꽁보리밥에 구더기 바글바글한 전어젓... 동성 소대장에 참혹한 강간도”
형제복지원 생존자 “꽁보리밥에 구더기 바글바글한 전어젓... 동성 소대장에 참혹한 강간도”
Posted : 2018-09-06 22:20
형제복지원 생존자 “꽁보리밥에 구더기 바글바글한 전어젓... 동성 소대장에 참혹한 강간도”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8년 9월 6일 (목요일)
■ 대담 : 최승우,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김용원 형제복지원 사건 담당 검사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군사정권 시절, 대표적인 인권 유린 사건으로 꼽히는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한국판 홀로코스트로 비유되는 참혹한 인권 유린 사건입니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12년 운영 기간 동안 확인된 사망자만 500여 명에 달하죠. 영문도 모른 채 잡혀간 사람들 가운데는 어린아이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검찰 수사가 진행됐지만, 원장에겐 횡령죄만 적용돼서 2년 6개월 만이 선고됐을 뿐입니다. 감금에 대한 법적 판단은 아예 없었죠. 이런 결과였다면, 당연히 재조사가 필요합니다만, 국회에서 반짝 논의된 특별법은 이렇다 할 진전이 없고요. 어제, 대검찰청 산하 검찰개혁위원회가 이 사건을 대법원에 ‘비상상고’ 하는 방안을 검토한 걸로 알려졌습니다만, 이후 알려진 소식은 없습니다. ‘형제복지원 사건’ 관련해서 좀 더 많은 얘기 해보겠습니다. 스튜디오에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최승우 씨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최승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이하 최승우)> 네, 안녕하십니까.

◇ 이동형> 한종선 씨도 나오셨습니다.

◆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이하 한종선)> 네, 안녕하십니까.

◇ 이동형> 두 분 오늘도 국회 앞에서 시위하신 겁니까?

◆ 최승우> 네, 노숙 농성 304일 차 하고 있습니다.

◇ 이동형> 304일째요? 진선미 의원이 특별법을 냈다고 하는데, 지금 이게 폐기된 상태고, 국회 앞에서 농성하면서 국회의원들하고도 이야기를 조금 나눠봤습니까?

◆ 한종선> 네, 그렇죠. 19대 법안은 폐기됐는데, 20대 때 진선미 의원님께서 다시 1호 법안으로 특별법으로 올려놓은 상태입니다.

◇ 이동형> 다시요. 통과는 아직 안 된 상태고, 비상상고라고 제가 아까 말씀드렸는데, 검찰 총장이 대법원에 직접 사건을 다시 판단해 달라, 라고 요청하는 건데요. 그 이후 이야기는 아직 나온 것이 없습니다. 조금 아쉬울 텐데, 대통령에게도 편지 썼다고요?

◆ 한종선> 네, 편지는 승우 형님이 국토대장정 하면서 썼습니다.

◆ 최승우> 제가 국토대장정 끝나고 나서 절실한 마음에서 문재인 대통령께 직접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 이동형>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 최승우> 그 내용은 왜 그때 당시에 제가 그렇게 아무 이유 없이 경찰 공권력에 강제로 끌려 들어갔었는지, 그리고 왜 내 가족인 동생이 죽어야만 했는지, 그런 것들을 묻고 싶었고 여기에 진상 규명을 해달라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문재인 대통령님께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 이동형> 그러면 지금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주된 내용은 어떤 것이죠?

◆ 한종선> 그렇죠. 진상 규명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그 진상 규명의 바탕에서 나오는 국가 책임에 대해서 국가로부터 사과, 그런 거죠. 그리고 트라우마 치유 정도.

◇ 이동형> 두 분은 몇 살 때 언제 여기 들어가게 된 겁니까?

◆ 한종선> 저는 1984년 아홉 살 나이로 작은 누나 열두 살과 함께 들어가게 됐고요.

◇ 이동형> 아홉 살이요? 열두 살 누나와 함께? 들어간 이유는 뭐죠?

◆ 한종선> 입소 자료에는 부랑인아로 돼서 들어가게 된 거고, 실제로는 저희 아버지가 직접 맡긴 거죠. 위탁 종용에 의해서.

◇ 이동형> 아버지는 그러면 보육원, 이런 개념으로 생각하셨습니까?

◆ 한종선> 경찰 공무원들이나 시 공무원들이 한 부모 가정에 찾아와서 국가가 관리해주는 곳이 있으니까 아이들을 배우게끔 하고 잘 먹인다, 이렇게 하니까 맡기게 된 거죠. 그리고 86년도에 아버지도 잡혀 들어오게 됐죠.

◇ 이동형> 아버지까지요?

◆ 한종선> 네.

◇ 이동형> 그러면 아홉 살, 열두 살 어린아이들에게도 폭력이 있었습니까?

◆ 한종선> 그렇죠. 더 어린아이한테도 폭력이 있었으니까.

◇ 이동형> 노동도 시키고요?

◆ 한종선> 그렇죠. 형제 복지원이 만들어진 계기가 1975년인데, 그때는 천막이었어요. 산에. 그런데 이제 사람들을 잡아 와서 강제 노역을 시키면서 산을 깎고, 거기에서 나온 토사물로 건물을 올린 것이거든요. 거기에 아이들이 다 동원되고, 어른들도 동원되고, 그러면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매질을 가하고, 밥도 굶기고, 이랬었죠.

◇ 이동형> 매질이라는 것이 구둣발로 차고, 뺨 때리고 이런 겁니까?

◆ 한종선> 그 정도는 간지러운 수준이고요. 마구잡이로 몽둥이로 두들겨 팼는데 머리가 깨지고, 이빨이 나가고, 장애가 생기고, 더 심하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고, 죽으면 그냥 묻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 이동형> 그러면 남녀노소 불명하고 그렇게 폭력을 가했던 거네요?

◆ 한종선> 그렇죠.

◇ 이동형> 피해 이야기는 조금 더 이따가 자세한 이야기 들어보도록 하고요. 여기서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어떻게 진행됐던 건지, 당시 검사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수사했던 김용원 변호사 연결해서 조금 더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변호사님?

◆ 김용원 형제복지원 사건 담당 검사 (이하 김용원)> 네, 안녕하십니까.

◇ 이동형> 변호사님께서 이 사건 처음 인지한 게 1986년도라고 하는데, 당시 현직 검사였습니까?

◆ 김용원> 네, 그렇습니다. 1986년도 12월 21일 날 제가 직접 목격하면서 사건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 이동형> 목격이 어떤 것을 목격한 거죠?

◆ 김용원> 산에 갔다가 우연히 수용자들의 강제 노역 현장을 본 거죠. 경비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지키고 있고, 경비견들도 있었고요. 그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건데 같이 갔던 사람 이야기가 인부들이 일을 하면서 잘못한다고 경비원들에게 몽둥이로 얻어맞는 장면을 많이 목격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것은 범죄행위다,’라고 생각했죠.

◇ 이동형> 그래서 수색 영장을 받아 들어가서 살펴보니까 어떻던가요?

◆ 김용원> 형제복지원을 수색한 것이 87년 1월 16일의 일인데, 압수수색하면서 짐작을 한 바는 있었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고서 굉장히 경악했습니다.

◇ 이동형> 들어가서 부랑인들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는데요. 직접 입소자들하고 인터뷰를 한 결과 그렇게 나온 겁니까?

◆ 김용원> 수용자들 중에서 울산 작업장에 끌려와서 강제노역을 하고 있던 사람이 180여 명인데, 그 180여 명 전원 조사를 했습니다. 그중에서 수용에 이른 경위, 어떻게 해서 이렇게 형제복지원에 잡혀 왔는가를 확인해보니까 대부분이 멀쩡한 사람들이 잡혀 와있다는 얘기죠. 이를테면 부산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느라고 역에 있던 의자에서 잡혀 온 사람, 그리고 부산의 용두산 공원이라고 있습니다. 용두산 공원에 바람 쐬러 갔다가 잡혀 온 사람, 또는 밤거리를 걷고 있다가 잡혀 온 사람, 이런 식으로 부랑인이 아니면서 잡혀 온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 이동형> 방금 변호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들어가서 보니까 정말 참혹했다고 얘기했잖아요? 그리고 당시 검사로서 박인근 원장과 직원들을 업무상 횡령, 특수감금으로 구속했는데, 나중에 재판에는 횡령 부분만 적용되었고, 그 결과 2년 6개월만 원장이 선고받았단 말이죠.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뭡니까?

◆ 김용원> 이게 말도 안 되는 결과인데, 사건의 죄목별로 따져보면 가장 중요한 죄명 이 특수감금과 업무상 횡령이었고, 나머지 외화관리법 위반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있었는데요. 이 특수감금부분이 무죄가 됐던 거죠. 특수감금 부분은 지방 법원하고, 고등 법원에서는 유죄로 판결했는데, 대법원이 무죄로 고집을 해서 대법원과 고등법원 사이에 사건을 몇 번 주고받다가 결국은 대법원의 뜻대로 그 부분이 무죄가 된 것이죠. 이게 무죄라는 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이게 유죄라고 하면 전두환 정권이 직접 수용자들에 대한 인권유린에 직접 가담했다는 것을 법률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전두환 정권이 내무부 훈령을 앞세워서 마구잡이 수용을 했기 때문에 이게 유죄라는 것은 아주 심각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정권적 차원에서 대법원에 외압을 가했을 것으로 보이고요. 당시 대법원은 전두환 정권의 시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죠. 그런 점에서 특수감금이 무죄였던 것이고요. 그다음에 업무상 횡령도 횡령 금액이 되게 많았었는데, 이게 징역 2년 6개월로 끝이 났단 말입니다. 이것도 사실은 굉장히 당시의 법조계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 당시에 박인근 원장의 변호인으로 선임됐던 사람이 대법관을 하다가 퇴직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었죠. 지금도 그런 분은 전관예우를 확실히 받는다고들 이야기가 되는데, 그 당시는 말할 것도 없었던 거죠. 이분을 선임했으면서 이렇게 중한 죄를, 특수감금을 빼고도 중한 죄를 저질렀죠. 그런데도 최종 형량이 2년 6개월로 정해졌으니까 그게 잘못된 거죠.

◇ 이동형> 결국은 국가 책임을 인정하기 싫어서 외압을 가했고, 또 전관예우까지 포함되면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판결이 나왔다고 보고 계시는 것 같아요. 이렇게 됨으로 해서 피해자들, 혹은 유족들은 배상이나, 이런 것은 생각지도 못했겠네요?

◆ 김용원> 당연하죠. 지금까지 국가의 잘못이라고 인정을 안 해주니까, 그래서 지금 형제복지원 특별법 제정 운동을 하고 있는 거죠. 이게 여러 차례 언론 보도나 사건의 내용이 확실하게 드러났으니까 국가 폭력이다, 국가가 진상을 조사해서 손해배상을 해주어야 하는데요. 그러려면 특별법을 제정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는 거죠.

◇ 이동형> 네, 알겠습니다. 변호사님, 오늘 말씀 여기까지만 듣겠습니다.

◆ 김용원> 네, 고맙습니다.

◇ 이동형> 네, 김용원 변호사 이야기 들어봤는데요. 이런 재판 결과가 나왔다는 건 언제 아셨어요?

◆ 한종선> 제가 이런 결과를 알게 된 것은 아버지와 누나를 정신병원에서 찾았을 때, 2007년 이후에 알게 됐습니다.

◇ 이동형>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알았겠네요? 상당히 분노 했겠습니다?

◆ 한종선> 저희 형제복지원 출신들은 박인근 원장이 구속됐다는 건 알았죠, 그 당시에. 그런데 사형 당했는줄 알았죠.

◇ 이동형> 그렇군요. 최승우 씨는 형제복지원에 어떤 계기로 들어가게 됐습니까?

◆ 최승우> 저는 그때 중학교 다닐 때입니다.

◇ 이동형> 중학생 때?

◆ 최승우> 중학교 1학년. 그 시절에는 교복 자율화가 아니라서 교복을 착용하고 모자에 마크까지 선명하게 찍혀있고, 그런 상태에서 가방을 들고 학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집 근처에 파출소가 있었어요. 파출소 순경이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지나가는 저를 보고 너 이리 와봐, 하면서 막 재촉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순간 그때 당시에 순경이라는 게 사실은 조금 겁이 났던 거죠. 그래서 뒷걸음질을 치고, 왜 그러세요, 그랬더니 순경이 어깻죽지를 잡고 파출소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죠. 그러면서 가방에 있던 빵을, 학교에서 급식을 줬어요. 그때 제가 결손 가정이었거든요. 아버지, 어머니가 이혼하고 할머니 밑에서 크고 있을 당시니까요. 그러다 보니까 학교에서 급식으로 준 빵을 점심때 안 먹고 가방 안에 넣어놨던 것에 누명을 씌운 거죠. 훔쳤다. 어디서 훔쳤냐고 하면서 경찰관이 저한테 그렇게 회유와 협박, 고문까지 했죠.

◇ 이동형> 고문까지. 중학생에게.

◆ 최승우> 당시에 옷을 벗기고 성기에다가 라이터를 대면서 훔쳤다고 이야기하면 집에 보내줄게, 끝까지 그렇게 해서 결국에는 훔쳤다고 이야기했고, 파출소 순경이 어디론가 전화를 했었어요. 전화를 하고, 형제복지원 차량이 들어왔죠. 그 차량이 들어온 시간이 얼마 안 됐어요. 전화하자마자 바로 왔기 때문에 집 근처 파출소가 불과 형제복지원하고 5분 거리밖에 안 됐거든요.

◇ 이동형> 그러면 파출소에서 그 차를 타고 잡혀간 거네요?

◆ 최승우> 그렇죠. 건장한 두 사람이 왔는데, 형제복지원 소대장, 그리고 선도원이라고 모자를 쓰고, 완장을 찬 사람들이 그 순경하고 일지에다가 뭘 쓰더라고요. 쓰면서 저는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가게 된 거죠.

◇ 이동형> 그러면 당시 파출소의 실적 경쟁이 있었다고 봐도 되겠네요. 중학교 교복 입은 학생을 부랑자도 아닌데, 그렇게 입소시켰다고 하면요. 몇 년을 계셨습니까?

◆ 최승우> 저는 4년 8개월. 한 5년 가까이 있었습니다. 14살 때 들어가서 19살 때 나왔으니까.

◇ 이동형> 몇 년 계셨어요?

◆ 한종선> 저는 84년, 9살에 들어가서 12살 때, 87년 폐쇄될 때까지 있었죠.

◇ 이동형> 생활은 어땠습니까? 폭행이 늘 있었고, 노동도 시켰다고 했는데요. 음식은 잘 나왔어요? 잘 나왔을 리 없을 것 같습니다만.

◆ 한종선> 음식은 그냥 꽁보리밥에다가 전어젓이라고 생선 썩은 것 있는데, 거기 파란색 드럼통이 있어요. 생선 담아놓는데. 거기 뚜껑 열어보면 썩은 내랑 구더기가 바글바글할 정도고, 깍두기가 나오는데, 무랑 배추, 김치 나오잖아요? 이것은 김해 들판에서 수확하고 거름으로 쓰려고 남긴, 씨알이 없는 것. 이런 것들을 수거해서 썰어서 소금에 뿌려놓은 허연 것. 이런 것 먹었죠. 그리고 그 당시에 선짓국이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선짓국이라고 먹어도 되지만 그때는 엄연히 소의 피는 산업 폐기물로 버려지던 것이었거든요. 그것 수거해서 먹고 그랬었죠.

◇ 이동형> 정말 참혹하네요.

◆ 한종선> 오히려 안 맞으면 그날이 더 불안한 날이에요.

◇ 이동형> 오늘은 왜 안 때리지, 이렇게 되는 거군요.

◆ 한종선> 그렇죠. 그게 더 무서운 거죠.

◇ 이동형> 아이는 아이들끼리 수용했습니까? 성인은 성인들끼리 수용하고?

◆ 한종선> 네, 나이대별로 아동소대가 한 네 개 정도 되고, 그리고 영유아 소대도 별도로 있고, 청소년 소대, 어른 소대, 작업 소대, 이렇게 다 분류돼 있었죠.

◇ 이동형> 식사를 이렇게 줬다고 하면, 위생 문제도 전혀 신경을 안 썼을 것 같아요. 샤워라든가, 목욕은 생각도 못 했을 것 같고.

◆ 한종선> 그렇죠.

◇ 이동형> 이것은 여성이나 아이에게도 포함되는 거죠? 전혀 씻지도 못했겠죠?

◆ 한종선> 아침에 세면 시간을 주거든요. 그런데 물을 세 바가지를 뿌려주는데, 한 소대당 대충 인원이 7, 80명 내지, 많게는 120명까지 있었거든요. 거의 15분 안짝으로 세면을 끝내야 해요. 모든 소대원들이. 그리고 수건 한 장 가지고 4등분으로 나눠서 써야 하는 거고요. 그리고 똥, 오줌도 허락을 받아야만 쌀 수 있고, 여름에는 뜨거운 온탕 같은 데는 목욕탕을 사용할 수가 없고, 겨울에만 일주일에 한 번, 아니면 한 달에 두 번 정도 샤워를 할 수 있었죠.

◇ 이동형> 혹시 외부인들하고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습니까? 아니면 가족과 연락할 수 있는 기회라든가요.

◆ 최승우> 당시에 편지를 보내준다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 편지는 한정되어 있었죠. 그냥 밖으로 ‘새마음’ 지라고 있었어요. 형제복지원 안에서 만든 소식지죠. 소식지에다가 편지를 보내준다는 것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그랬던 거지, 사실은 편지조차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 이동형> 왜 이런 말씀을 드렸냐면, 너무 힘드니까 혹시 외부인들 만나면 SOS 요청도 할 수 있고, 가족에게 도와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전혀 안 됐단 말씀이죠?

◆ 최승우> 외부인들이 들어오면, 예를 들어서 시 공무원들이 들어오잖아요? 저희들은 갇혀 있어요. 그러니까 박인근 원장이라든지, 총무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문을 잠가 놓고 거기에 순찰을 잠시 돌아보고 가는 정도니까요. 외부인들은 거의 만나보지도 못하고, 만약에 외부인들이 들어왔다, 그러면 그 사람들에게 접근을 못 하게 하죠. 말도 못 붙이게 감시를 하죠.

◇ 이동형> 한종선 씨는 굉장히 어린 나이에 들어갔다가 또 어린 나이에 나왔잖아요? 나오고 나서도 사회생활이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큰 충격을 받아서요.

◆ 한종선> 굉장히 어렵죠. 왜냐하면, 한창 누나 품에서, 또 아버지 밑에서 가족하고 살아야 할 나이에 강제적으로 군대보다 더 험한 곳에서 살다 보니까 형제복지원이 폐쇄되고 다른 고아원으로 전원 조치되고 부터는 계속 탈출을 하는 거죠. 누나, 아버지 보고 싶으니까. 그리고 사회 나와서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사회에서는 고아다 보니까 저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만 하고, 또 형제복지원으로 보낸다는 식으로 협박하고 했죠.

◇ 이동형> 혹시 여성 재소자들에게 성폭행, 이런 것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 최승우> 네, 그 안에서는 저 역시도 열네 살 때 파출소 순경에게 끌려들어 가고요. 제가 82년도에 들어갔거든요. 형제복지원 입소하게 되면 2층 병동에 잠시 머물렀다가 신입 소대로 보내요. 저 같은 경우는 혼자 소대장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강간을 당했죠. 동성 간. 참혹하게 성폭행을 당하고, 제가 4년 8개월, 한 5년 가까이 거의 남자들한테 성폭행을 많이 당했죠. 그때 당시에 어리고, 귀엽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제가 24소대 아동 소대에 있을 때 바로 앞이 25소대, 26소대 여자 소대였어요. 지금도 이름이 기억나는데, 그때 당시에 피해자 중에 미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분이 여자가 앞에 내려와서 중대장한테 성폭행을 당해서 당시에 멍이 시퍼렇게 들었더라고요. 그 친구가 저보고 중대장 욕을 했던 적이 있어요. 변태라고.

◇ 이동형> 그때 기억이 생생하게 나시는군요.

◆ 최승우> 생생하게 나죠. 비일비재하게 그렇게 남자아이들과 여성들은 성폭행에 노출되어 있었죠.

◇ 이동형> 제가 모두에서 말씀드렸다시피 500명 넘는 분들이 사망했잖아요. 구타로 인한 사망, 또 여러 가지 있을 텐데, 사망자 사체는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 한종선> 그 당시에 사망자들이 나오게 나면 병원으로 일단 보내요. 응급차로. 그래 놓고 거기에서 해부용으로 사용하면 돈 받고 팔려나가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시체들은 다시 돌아와서 교회당 뒤편 보면 무덤들이 잔뜩 있어요. 거기 가서 묻어버리는 거예요.

◇ 이동형> 그냥, 묘비 이런 것도 하나도 없이 묻어버리는군요.

◆ 한종선> 묘비는 있죠. ‘욥의 무덤’이든, 이렇게 해서 기독교 이름들 있잖아요. 성직자들. 그런 식으로 십자가 있는 무덤. 그런데 오래 묻어둔 무덤 같은 경우는 풀이 있는데, 새로 파묻은 곳에는 풀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묻었던 곳에다가 또 묻는 거죠.

◇ 이동형> 그래요. 박인근 원장 지금은 사망했습니다만,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훈장까지 받았어요? 혹시 집단적으로 우리가 저항을 해보자든가, 탈출을 꿈꾼다든가, 이런 적은 없었습니까?

◆ 최승우> 그 안에서 한 번 제가 본 것이 있죠. 박인근 원장 부인을 흉기를 들고 죽인다고 하면서 풀어달라고 막 한 사람을 보았어요.

◇ 이동형> 있었군요.

◆ 최승우> 있었는데, 결국 그 사람은 중대장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한테 붙잡혀서 거의 그 자리에서 엄청나게 폭행을 당하고, 그 뒤에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 이동형> 네, 청취자님께서 “방송 당시 하도 그 후로 당사자 처벌이 이루어진 줄 알았는데, 방송 후 2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제자리라니 너무 화가 납니다.” 지금 댓글 창이 폭발하고 있습니다. 너무 안타깝다고,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데요. 현재 피해들이 궁극적으로 제일 바라는 것은 진상 규명이 우선일 테고요. 그러면 특별법이 만들어져서 재수사가 당연히 들어가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까 두 분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이게 가족도 잘 없고, 어디 힘없고, 돈 없고, ‘백’ 없는 사람들만 골라서 집어넣은 것 아니에요? 그러면 내가 피해를 당했다고 쉽게 말하는 분들도 없을 것 같아요.

◆ 최승우> 형제복지원 자체가 부랑인아 수용소잖아요. 멀쩡한 사람들을 끌고 가서 부랑인을 만들어 버리는 거죠. 그 안에서 부랑인이 생산되어 버리는, 생산되었기 때문에 그때 당시 법적으로 뭐도 없이 형제복지원 사건이 87년 일어나고 나서 무작정 폐쇄를 해버리고 나오니까 그 피해자들은 그냥 부랑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거죠.

◇ 이동형> 피해자들끼리는 모여서 의견도 교환하고 하십니까?

◆ 한종선> 저희가 두 달에 한 번씩 정기 회의를 하고 있고요. 그리고 긴급회의를 계속 열어가면서 지금 우리가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요구한 지가 7년 차 됐거든요. 7년 동안 계속 커뮤니케이션해가면서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남아서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계속 논의하고 있습니다.

◇ 이동형> 농성은 언제까지 하실 작정이십니까?

◆ 한종선> 일단 특별법이 통과될 때까지는 해야죠.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잖아요.

◇ 이동형> 올여름에 너무 더웠는데, 힘드시지 않으셨어요?

◆ 한종선> 진짜 가장 힘들었어요. 7년 동안 중에서 가장 힘들었고, 추위도 굉장히 추웠어요. 그런데 이제 곧 겨울이 또 와요.

◆ 최승우> 추위 같은 경우는 정말 겨울에 독감 걸려서 죽다 살았고요.

◇ 이동형> 농성하다가?

◆ 최승우> 네,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새벽에 33도더라고요. 그때 당시에 아침에 잠시 잠이 깊이 들었는데, 햇빛을 받고 열사병에 걸려서 병원에 실려 가고, 정말 힘들었습니다.

◇ 이동형> 지금 생존해 계신 분은 몇 분쯤 계십니까?

◆ 한종선> 생존해 계신 분들, 저한테 연락이 안 오시는 분들까지 포함하면 한 2,000여 명은 살아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3,500여 명 중에서 나이 드신 분들 한 1,500여 분은 돌아가셨다고 봤을 때 살아있는 아동들이나 젊으신 분들은 지금 어른이 되어 있겠죠.

◇ 이동형> 3,500명이나 수용되어 있었어요?

◆ 한종선> 많게는 4,500명까지 있었죠.

◇ 이동형> 시설이 그렇게 컸습니까?

◆ 한종선> 그렇죠. 28개 소대가 있었고, 한 소대당 7, 80명 내지, 100명 가까이로 추정하면 그것만 해도 한 2,500 넘죠. 그리고 A, B, C동이라는 5층짜리 건물, 정신병동이 있어요. 그리고 별도로 결핵 소대가 있어요. 영유아, 아동 소대가 또 따로 있죠. 그러니까 엄청 나게 많은 거죠.

◆ 최승우> 교회당이 3,000명이 들어가는 곳이니까 얼마나 크겠습니까?

◇ 이동형> 그러면 다 따닥따닥 붙어서 잤을 테고요.

◆ 한종선> 그렇죠. 칼잠이죠.

◇ 이동형> 전염병, 이런 것도 있었겠어요.

◆ 최승우> 피부병 걸린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죠. 그 안에 는 의사가 없었어요. 의사도 없었고, 그냥 잡혀 온 수용자가 거기에 조금 지식 가지고 그냥 약 같은 거 조금 발라줄 정도였으니까요.

◆ 한종선> 전염병 에피소드는 제가 열 살 때 홍역이 걸린 적이 있어요. 몸에 열이 나고 그러니까 약은 안 주고, 그냥 홀딱 벗겨놓고, 그때 여름이었거든요. 시멘트 바닥이니까 차갑잖아요. 팬티만 입혀놓고 누워있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30분에 한 번씩 뒤집어요. 그래야 열 내린다고.

◇ 이동형> 네, 두 분 말씀 여기까지만 듣겠습니다. 언젠가 이 특별법이 꼭 국회에서 통과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최승우, 한종선>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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