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도 비도 막을수 없었다...2차 상봉 시작

태풍도 비도 막을수 없었다...2차 상봉 시작

2018.08.24. 오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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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도 비도 막을수 없었다...2차 상봉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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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환 / 정치·안보 전문기자, 박원곤 / 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교수

[앵커]
2차 이산가족 상봉이 조금 전 예정대로 시작됐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나는 아들. 100살인 언니까지 가슴 아픈 사연들이 가득합니다.

김주환 YTN 정치안보 전문기자,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교수와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두 분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이제 오늘부터 북측 가족이 우리 측 가족을 찾는 2차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됩니다. 태풍, 비도 이 일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차 상봉 때와 일정이 똑같이 진행되는 건가요?

[기자]
똑같은데 시청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설명드리자면 1차 때는 북녘이 고향이었다가 남측에서 찾는 것이고 2차는 남녘, 지금 우리 남측이 고향인 사람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북에 가서 살게 된 사람들이 남측 가족들을 찾는 그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컴퓨터 추첨을 해서 추첨을 하는데 북측은 선발 방식이 우리하고 조금 다릅니다. 지명을 하는 형태죠. 그래서 아마 화면이 들어오면 알겠습니다마는 2차 때까지는 공통된 점은 북측 관계자들이 이른바 북한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훈, 포장을 가득 차고 왔는데 이번에 실제 화면이 잠시 후면 들어오겠습니다마는 실제 이번에도 그랬는지는 좀 있으면 나타날 수 있겠죠.

[앵커]
북측 가족 같은 경우는 남한에 있는 가족들을 찾을 때 그 신청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 건가요?

[기자]
신청 절차는 사실 없고요. 북한은 기본적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정치적 이벤트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런 부분 때문에 사실은 이산가족 상봉 문제도 북한 정권에서는 사실 계륵 같은 겁니다. 안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이번에도 대외매체에서보도를 했지만 대내매체에서는 보도를 하나도 안 했거든요. 그래서 자기들 나름대로 기준점이 있는데 과거에 보면 분야별로 우리로 표현하면 영향력을 행사해서 남측 가족들을 만나겠다. 그래서 과거에 보면 2차 상봉 때 우리 측에서 저 사람은 두 번씩 만나냐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앵커]
잠시 뒤면 3시부터 진행된 단체상봉 화면이 들어오게 될 텐데 이 화면은 들어오는 대로 저희가 바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차 상봉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역시 가족들과 오붓하게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지 않습니까?

1차 때와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될까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이게 저희가 21번 했고 22번으로 넘어가서 23번까지 가는데 이전과 가장 큰 차이가 객설 상봉이 길어졌고 같이 객실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라는 거죠.

이전에는 전체적으로 다 모여서 공동식사를 하니까 아무래도 부담이 되고 또 서로 가족 간의 정을 나누기에 어려움이 있는데 이번에 새로 시작한 것이 1차 상봉에서 상당히 좋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2차 상봉도 같은 형태로 이뤄지고요. 아마 조금 더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는 시간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가족끼리 만나는 그 시각, 호텔방에서 도시락을 먹고 얘기를 나누고 그런 시간을 갖지 않았습니까? 언론에는 그 시간이 전혀 공개 안 되는 거죠?

[기자]
그렇죠. 1차 때도 공개를 안 해서 사실은 현장에서 취재하는 기자들은 조금 더 뭉클한 장면을 담고 싶은데 가족들 입장에서는 프라이버시를 보호받고자 하는 그런 상반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내일 아마 점심 때 똑같은 행사가 벌어질 텐데 역시 기자들은 복도만 촬영하고 1차 때 비춰보면 도시락이 배달되는 정도만 촬영이 허가될 것 같습니다.

[앵커]
앞서서도 이야기했지만 태풍 때문에, 날씨 때문에 취소가 되지 않을까, 이런 걱정도 있었는데 역시나 하늘이 도왔던 것 같습니다. 어젯밤에 용 꿈을 꾸었다. 이런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이산가족 가족 입장에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고 학수고대하던 것이겠죠. 그런데 지금 태풍이 오고 있는 상황이라서 또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그래도 다행히도 태풍이 좀 비껴가서 예정대로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우리도 굉장히 기쁜 소식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우려하는 것이 전반적으로 지금 이산가족 상봉, 북측 남측 다 마찬가지입니다마는 전체적으로 고령자들이 많이 계시기 때문에 여러 가지 건강이라든지 이동 같은 것에 신경이 많이 쓰이죠. 우리 한측 같은 경우, 남측에서도 그것을 가장 우선적으로 안전과 건강 같은 것을 생각해서 지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

만약에 태풍 때문에 영향을 받게 된다면 상봉이 하루이틀 늦춰질 수도 있고 그러면 또 대기하는 동안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고. 전반적으로 어쨌든 태풍이 지나가서 예정대로 하게 돼서 이것은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앵커]
지금 저희가 가족들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서 이동할 당시의 화면을 보여드리고 있는데 지금 비 오는 장면, 바람이 또 많이 부는 장면 이런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사연을 좀 보니까 제주도가 고향이신 가족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올라올 때 많이 걱정하셨다고 그런 얘기를...

[기자]
지금 자막에 나오는 100살 강정옥 할머니가 북에 있는 언니를 찾는 경우예요. 그런데 할머니의 육십 중반의 딸과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탔는데 다행히 어제 결항이 됐는데 그제, 이틀 전에 서울 오는 비행기를 타는 바람에 무사히 참석할 수 있게 됐고요.

그래서 북측의 강정화라는 여동생이 언니를, 제주도 출신인데 언니를 찾아서 지금 상봉 중에 있을 겁니다. 아마 단체상봉이 17시까지니까요. 한창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을 겁니다.

[앵커]
100살 언니가 85살 동생을 만나는 그런 장면, 잠시 뒤에 보실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유일한 부모 자식간의 상봉 사연도 있습니다. 얼굴도 몰랐던 아버지를 처음 뵙는 거 아니겠습니까?

[기자]
어제 사실은 처음 단독 인터뷰를 해서 화면이 나갔습니다마는 유복자인데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북으로 갔다라고 하죠.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엄마가 부인이 되시는 분이 두 달 전에 돌아가셨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북측 할아버지 조덕용 할아버지 88세이신데 굉장히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앵커]
그래서 아들이 어머니께서 평생을 아버지를 기다리셨는데 어머니의 그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또 오늘 상봉장에 나오신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습니다.

[앵커]
이번에 이 사연들을 보니까 대부분 형제, 자매, 남매 이렇게 상봉을 하고 지금 방금 전에 얘기했던 조덕용 할아버지 그리고 조정기. 아드님 되시는 조정기 할아버지 이 가족 같은 경우에 유일한 부자 상봉이거든요.

[인터뷰]
점점 고령화가 되니까 안타까운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는 거죠. 예를 들어서 부부 상봉은 이번에 하나도 없는 것으로 지금 보이고. 부모자식 간에, 직계 상봉이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나마 형제도 또 사촌 이상의 그런 관계가족간의 상봉이 지금 이뤄지고요. 물론 그런 상봉도 다 하나하나 의미가 있다고 판단됩니다마는 아직까지도 직계가 있다면 우선적으로 상봉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제도적으로 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앵커]
지금 저희가 보여드리는 화면이 남측의 조정기 할아버지가 북측의 아버지, 조덕용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이동할 당시의 그 장면을 함께 보고 계십니다.

사전에 인터뷰한 내용을 봤더니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계속 68년을 기다리셨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한풀이하러 가는 거다 이런 말씀도 하시더라고요.

[기자]
그렇죠. 태어나시고 나서도 아버지 존재를 몰랐으니까. 그런데 68년 만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거 아닙니까?

아버지가 북에 살아있다. 그런데 아버지가 엄마와 자식을 찾는다. 이렇게 연결이 된 거죠.

[앵커]
그래서 한편으로는 기쁜데 아버지를 못 보시고 떠나신 어머님 생각하면 마음이 그렇다, 이렇게도 말씀하셨어요.

[기자]
사실 이런 사연도 있고요. 아직 화면에 안 비춥니다마는 국민학교 졸업을 하고 여차저차 헤어졌는데 엄마가 여동생 그 딸한테 본인한테 나중에 너희 작은엄마를 찾으면 꼭 전해주라고. 국민학교 졸업장을 가보처럼 68년처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작은엄마한테 전해 주겠다는 사연도 있습니다.

[인터뷰]
이번 2차 상봉 특징 중 하나가 북측에서 먼저 남측에 있는 가족들을 찾는 거였지 않습니까. 그 과정에서 보니까 우리 남측에 있는 가족들이 북측에 있는 형제, 자매라든지 이미 생사가 확인이 안 된 상태에서 대부분 사망했다라는 사례, 그렇게 생각하고 제사를 지낸 그런 사례들이 적지 않게 발견됐다라는 거죠.

이번 이런 사례를 통해서 우리가 또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최소한 생사여부는 빨리 확인하는 것이 남측이랑 북측의 가족들의 비극을 막는 일이 아닌가. 그 부분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아까 저희가 보여드렸던 조정기 할아버지 같은 경우 이번에 처음 아버지 사진을 받아서 봤다고 합니다.

[기자]
그렇죠. 북측에서 사진을 전달해 주고...

[앵커]
그 사진을 봤더니 아버지랑 많이 닮았더라 해서.

[기자]
지금 저 모습이 아들인 조정기 할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앵커]
조정기 할머니 딸들이 할아버지랑 아빠가 많이 닮았다 이런 얘기를 했다고, 그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있다가 화면을 통해서 부자 상봉하는 모습을 같이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앵커]
이산가족이 점점 고령화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전해드렸었는데 그 아래 세대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첫째형과 만나는 김현수 할아버지 손녀딸을 뒀는데 그 손녀딸이 큰할아버지에게 정성을 가득 담은 편지를 준비했다고 하죠.

[인터뷰]
시간이 많이 지날수록 이런 일들은 어쩔 수 없이 발생합니다. 꼭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고요. 다만 어쨌든 우리의 문화, 또 한국의 문화. 전반적인 유교문화에서는 가족의 중요성이 매우 중요하지 않습니까.

특히 뿌리를 찾는 그런 일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손녀딸 입장에서도 큰아버지, 큰할아버지죠. 어떤 분이었는지 또 살아계셨다면, 살아계시면 어떻게 계시는지 궁금증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이 되고요.

어쨌든 다행히 북측의 형은 방금 말씀하신 김용수라는 분인데 이번에 남측의 김현수 할아버지와 같이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역시 분단으로 인한 헤어짐이지만 또 하나의 나름대로 가족에게는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김현수 할아버지가 전쟁 당시 큰형, 그러니까 김용수 할아버지와 헤어질 때 9살이었답니다. 9살에 헤어진 큰형을 만나는 그런 오늘 상봉 날이 될 텐데 하늘에서 로또가 떨어진 기분이다.

[기자]
그 말씀을 했고 손녀딸의 편지 화면이 나왔는데 사진을 읽어봤는데 저는 북한을 주로 취재하는 기자 입장에서 안타까운 게 남북 통일이라는 표현을 써요.

표현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1차 때 북측의 손자가 남측의 할아버지한테 똑같은 방식의 그림을 그려줬는데 그때는 용어가 조국통일입니다.

이게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우리가 70년간의 분단이 있다라고 보니까 보이지 않는 인식 차가.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께서도 8.15 경축사에서 분단은 우리의 인식을 분단시켰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얘기거든요.

우리의 의식이 작아지고 있고. 왜 이 말씀을 드리냐면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중 국경에 사는 사람들이 동북 3성 나갔다라는 표현을, 확장적 언어로 썼는데 들어갔다는 표현을 썼는데 지금은 나간다라는 의식이 작아지는 거죠. 문재인 대통령께서 8.15 경축사에서 그걸 굉장히 함축적으로 설명했었죠.

[인터뷰]
저도 그 부분을 제일 우려하는데요. 이게 분단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남북 간에 이질감이 지금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라고 판단이 됩니다. 지난번에 우리 남측 공연단이 평양 공연을 할 때 사실 저는 레드벨벳의 공연을 유심히 봤거든요.

특히 북측에서 오는 관람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레드벨벳이라면 한류이고 한류는 이것이 단순히 한국에서만 유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문화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북한같이 우리 한민족으로서 역사를 공유하고 언어를 쓰는 같은 민족인 북한의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제가 우려했던 것처럼 굉장히 긴장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만큼 남북 간의 이질감이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요.

그런 의미에서도 이런 이산가족 상봉을 비롯해서 남북 간 교류 협력은 빨리 활성화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앵커]
가족들 간에도 60년 넘게 헤어졌다가 마음으로만 그려보다가 만나는 상봉장에서 처음에는 조금 서먹한 경우도 더러 있더라고요.

[기자]
그래서 이번에 남북이산상봉에서 남측 관계자들하고 북측 관계자들이 나름대로 세밀하게 준비했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체제적인 얘기를 가급적 하지 말자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차 때 북측 가족이 김일성, 김정일 관련한 것을 테이블에 올려두니까 남측 진행자가 테이블 밑으로 내려라, 그런 이야기를 나누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 부분은 굉장히 서로가교집합점을 찾았기 때문에 굉장히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 사실 이념논쟁을 많이 했어요.

[인터뷰]
저도 기억하는데 이게 이전에는 우리 한측, 남측에서는 가기 전에 충분히 교육합니다. 특히 체제의 문제에 대해서 또 북한 지도자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말라고 충분히 교육이 돼서 우리 남측의 방문단은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는데 늘 북측에서 보면 꼭 헤어질 때쯤에 돼서 체제 선전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얼마나 잘살고 또 지도자 수령의 은덕이다 그런 얘기가 꼭 들어가서 우리를 불편하게 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모습들이 안 보였습니다. 이것도 변화된 남북관계를 반영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드네요.

[앵커]
이번에 사전 인터뷰를 보니까 가족분들, 남측의 가족분들도 북측의 이산가족을 만났을 때 질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 이것도 궁금해하시더라고요.

[기자]
그렇죠. 달라진 모습 중 하나가 1차 때 이번에 남측 가족들이 1차 때 내려올 때 제가 이틀 전에 언급했습니다마는 과거에는 20차 때까지는 헤어질 때 줄을 서서 버스 안에 접근을 못 하게 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 모습이 없었어요. 나름대로 그게 굉장히 큰 변화들입니다. 이렇게 어쩌다가 이산가족 상봉을 하니까 무슨 변화가 있겠냐 하는데 사실 흐름으로 보면 굉장히 큰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앵커]
선물하거나 이런 부분도 다르지 않습니까?

[기자]
그건 과거에도 했습니다마는 이번에는 과거에는 주소 적는 것까지 통제했거든요. 그런데 서슴없이 했고 1차 때 남측 가족이, 동행했던 가족이 디지털 카메라로 다 사진을 찍어서 카메라째로 북측에 전달해도 아무 이상 없이 전달받고, 가족들한테 전달되고 이런 현상들이 나타났죠.

[인터뷰]
북측에서 우리가 보장성원이라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장성원이 마치 우리 입장에서는 감시하는 사람이다라는 건데 북한 입장에서는 일단 안내요원, 진행요원 같은 거거든요.

사실상 전의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 보장성원들이 감시자 역할을 적지 않게 했습니다. 가까이 가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그런 것을 귀담아 듣는 모습도 있었고 뭔가 제재하는 모습도 보였는데 이번에는 그런 모습들이 안 보였죠. 오히려 숫자도 많이 줄었고요.

그리고 심지어는 사진을 찍어준다든지 말 그대로 진행이 잘 되도록 도와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모습들도 보였습니다.

[앵커]
워낙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 보니까 남북 간에 이질감도 있고 어색함도 분명히 있겠지만 분명히 변화하는 모습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간 오랜 세월 소식을 모르면서 지냈기 때문에 사망한 줄로만 알았던 가족들이 있었는데 기적적으로 생사를 확인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남동생을 만나는 경우인데요.

권혁만 할아버님께서 남동생 권혁찬, 권혁빈 할아버님과 만나게 됩니다. 사연을 보니까 젊은 사람들을 잡아간다고 그래서 뒷간에 숨어 있다가 북한군에 잡혔다.

[기자]
그런 경우도 있었고요. 속초가 고향인 형제분은 사실 속초라는 곳이 전쟁 이전에 38이북이었죠. 북한 지역이었는데 전쟁이 나게 국군이 진격하니까 북쪽으로 피난을 갔다고 하죠. 북쪽으로 피난을 갔는데 형제가 헤어진 이런 사례도 있어요.

과거 사례에는 어떤 게 있었냐면 쌍둥이 형제였는데 형은 국군장교였고 동생은 인민군 장교였습니다. 그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앵커]
저희가 권혁만, 북측 권혁만 할아버지 가족 사례를 얘기해봤는데 북측의 큰형과 남한의 둘째, 셋째 형제가 이번에 만나는 그런 경우입니다. 전쟁 당시에 아버님이 마포경찰서에서 근무했다고 그렇게 사전 인터뷰에서 말씀하셨더라고요.

60년 넘는 세월이 지나서 형제가 상봉을 하게 된 그런 경우입니다. 이번에 이런 경우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인터뷰]
형제 상봉이 좀 많죠. 아까 우리가 본 부모 자식간의 상봉은 지금 한 사례이고 부부 상봉은 2차 상봉은 없다고 알려져 있고요.

결국 형제간의 상봉이 앞으로도 남은 상봉 중 제일 많을 경우라고 하는데 우리 역사에서 나타나는 부분이기는 합니마는 비극이죠. 같은 형제였는데 한 명은 자의든 타의든 어쨌든 그렇게 헤어져서 살 수밖에 없는 경우가 종종 보이고요.

아까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대부분의 경우, 특히 이번에 남측에서 신청을 받고, 북측 신청을 받고 남측에서 많이 놀란 것이 그런 형제나 자매들이 대부분 사망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생사가 확인이 되니까 기쁘면서도 놀라는 그런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조금 이따가 화면이 나오겠습니다마는 그런 상봉의 모습들은 우리의 살아있는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앵커]
조금 전에 박경서 적십자총재가 가족들을 만나는 모습을 같이 보셨고요.

[기자]
한화리조트에서 출발하기 전에 천해성 통일부 차관과 여러 가지 얘기를... 사실은 박경서 적십자총재는 북한을 30여 차례 방문했습니다. 인도주의적 관련해서 일을 많이 하셨고 제네바에서 오래 거주하셨기 때문에, 사실 9월달에 방북을 한다니까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해서 굉장히 좋은 소식을 갖고 오기를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1차 때 만찬사 때 북측 박용일 조평통 부위원장이 굉장히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그 연장선상에서 기자들한테 9월달에 평양을 간다.

인도주의문제, 이산가족 상봉 문제에 대해서 보다 결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실제 그런 것들이 어떤 결과물을 갖고 오기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앵커]
지금 현장 화면을 저희가 보여드리고 있는데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그래도 태풍이 지나가서 비가 내리고 있지만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되게 됐습니다.

[기자]
사실 이번에 비가 많이 오니까 우리 진행요원들까지 합치면 430여 명이 방북했는데 소방관계자도, 119 소방차도 늘리고 여러 가지 늘렸답니다.

그래서 혹시나 했는데 비가 다행히 비껴갔는데 다행히 원산만 쪽에 오늘 아침에 북한 관련 기사를 보면 원산 위에 강원도 문천시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는 비가 600mm가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금강산 지역은 200mm가 채 안 왔다고 합니다, 바람도 별로 없었고요.

[앵커]
하늘이 도왔네요. 버스에 내려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 함께 보고계신데 아마 이때의 감정이 가장 미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장 긴장되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고 낯선 기분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인터뷰]
당연히 그럴 거다라고 예상되고요. 조금 전에 형제 상봉을 하나 말씀드렸는데 지금 자막에도 나왔습니다마는 북측의 한상이 씨를 만나는 남측의 한상엽 또 여동생 한국화 씨 같은 경우에는 형이죠.

한상이 씨가 20살 때 경기 강화군에 살던 중에 인민군에 징집돼서 헤어지게 됐다고 합니다. 문제는 남측에 있는 동생들이 다 사망했다고 생각해서 형이죠. 한상이 씨에 대한 제사를 사흘 전에 지냈다고 합니다.

연락을 받고 오늘 만나게 됐는데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 상봉에는 이렇게 생사 여부가 확인이 안 됐다가 결국은 거의 사망으로 생각했다가 지금 확인된 경우가 적지 않게 있습니다. 더욱더 상봉이 극적이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앵커]
동생이나 언니나 오빠가 죽은 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경우들이 이번에 많더라고요. 지금 행사장으로 이동하는 장면을 조금 전 금강산호텔의 상황을 보고 계십니다.

가족들은 날씨 때문에 행여나 행사가 취소되지 않을까 많이 걱정을 하셨다고 합니다.

[기자]
동반 가족들이 1인당 우리 이번에 남측 가족들만 81명이 신청했는데 원래 83명인데 한쪽은 북측 관계자 가족의 건강 문제 한쪽은 남측 관계자의 건강 문제. 81가족인데 우리가 동행할 수 있는 가족이 5명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차 때 안타까운 사연이 한 분 있었죠. 91살된 할아버지인데 앞을 못 보는데 동행해 줄 가족이 없어서 상봉을 포기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나마 여기 지금 오시는 분은 어린 손주들, 아마 증손자가 될 수도 있고 그 친구는 굉장히 자기가 몰랐던 증조부나 증조할머니나 증조 할아버지 혹은 큰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어린나이, 굉장히 좋은 추억을 경험하게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앵커]
이번에 가족을 찾는 과정에서 개명을 한 사례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전에 신청을 했을 때 개명을 해서 찾지 못했다가 이번에 원래 이름으로 신청을 하면서 찾은 경우도 있고. 그런 경우들이 눈에 띄었는데 왜 개명을 했을까 이게 궁금하기도 했거든요.

[인터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마는 아마 역사적으로 볼 때는 남측도 그렇고 북측도 그렇고 일단은 월남자가 있다든지 월북자가 있다는 것이 삶을 사는 데 굉장히 어려움이 많이 있었죠.

이게 북한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른바 연좌제라는 것이 있어서 월북한 가족이 있으면 공무원이 못되고 하는 그런 불이익을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아마 개명을 한 경우도 적지 않다고 생각되고요.

지금 말씀하신 것 중 한 사례는 아마 북측에 있는 형제가 사망을 했다고 생각해서 남측에 있는 동생이 이름을 바꾼 형태로, 그런 사례로 알려져 있고요. 말씀드린 것처럼 이렇게 개명이 됐기 때문에 만약 개명된 것으로 이산가족을 찾는다면 못 찾았죠.

그래서 이번 사례도 보면 원래 이름대로 하니까 생사 여부가 확인이 돼서 만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앵커]
지금 북측의 강호례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이번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참여한 강후남 할머니 가족을 보고 계십니다.

강후남 할머니가 남측 동생이고 강호례 할머니가 북측의 언니입니다. 자매상봉의 경우 거든요.

[앵커]
그렇습니다. 강호례 할머니께서 북으로 시집을 간 뒤에 전쟁이 나면서 친정 식구들과 헤어지게 됐다 이런 사연이 있는데요. 남쪽에 계신 어머니께서는 큰딸이 소식이 끊긴 후로 명절 때마다 많이 우셨다고 합니다.

[기자]
지금 화면은 풀기자들이 보내오는 화면인데 단체 상봉 직전에 북측 가족들을 기다리는 남측 가족들의 모습이죠. 지금 아마 굉장히 설레고 지금 폴라로이드 인화지를 계속 보여드리고 있는데 적십자사 측에서 현장에서 바로 인화가 되니까 계속 찍어주는 서비스사업을 하는데 일부 어떤 특정 기업의 지원을 받아서 하는데 굉장히 반응이 좋다고 합니다.

북측 가족들한테도 많이 해 주고. 그래서 1차 때보다 2차 때는 좀 폴라로이드 대수를 늘렸다라고 합니다.

[앵커]
바로바로 찍어서 인화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요.

[기자]
사진을 나누어 가질 수 있으니까요.

[인터뷰]
관련해서 1차 상봉 때 북측에서 준비를 많이 했다고 이번에 보이는 것이 나름대로 가계도를 만들어서 사진으로 만들어서 갖고 왔더라고요.

전에는 볼 수 없던 부분들인데 헤어진 지 오래됐으니까 또 북측에서도 나름대로 그곳에서 가족들을 형성했을 테니까 가족이 지금 어떻게 되고 또 자식이 있으면 어떻게 되고 그런 모습들을 사진과 같이 가계도를 그려서 갖고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남측에 전달했다라고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앵커]
지금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모습도 보고 계신데 그간 그리움이 다 터져나오고 있을 것 같은데요. 현장음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북측의 가족들이 입장하고 있는데요. 북측의 강정화 할머니인 것으로 보입니다. 저희가 소개해드렸던 최고령자 이번 남측 가족 중에 최고령자인 강정옥 할머니를 만나게 되는데요. 강정화 할머니께서는...

[기자]
지금 아주 오랜 세월 떨어져 있으니까 남과 북이 약속을 합니다. 테이블 번호를. 그래서 본인도 명찰에 테이블 번호를 적고 그 테이블 번호를 찾아가는 겁니다.

[앵커]
조금 전에 권혁만 할아버지 가족, 북측의 권혁만 할아버지 가족이 이동하는 모습이었죠. 지금 상봉하는 장면 함께 보고 계십니다. 소리 한번 들어볼까요? 껴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기자]
김용수 할아버지가 남측의 김현수 남동생. 앞서 저희가 손녀딸이 편지를 썼다는 사연 보내드렸죠. 테이블 번호상으로 보면 그 가족들 같습니다.

[앵커]
9살 때 헤어졌던 큰형을 만나는 북측의 김용수 할아버지 가족의 상봉 장면을 보고 계십니다. 분단 이후에 헤어졌다가 이제서야 만났습니다. 얼마나 그동안 그리웠을까요?

큰형이 북측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김용수 할아버지가 아버지, 어머니 산소를 찾아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큰형님 살아있습니다 이러면서 제사를 지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봉장에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기자]
그렇습니다. 사실 꿈이냐, 생시냐라는 것을 많이 언급을 한다고 합니다.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졌죠.

[앵커]
북측의 김인용 할아버지 가족인데요. 남측의 목원구, 목원선 할아버지의 형입니다. 원래 목원희가 본명인데 김인영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해졌습니다.

[기자]
제가 이번에 또 큰 변화 중에 실제 북측 가족들을 보니까 과거와 달리 훈, 포장 이런 거, 일종의 과시인데, 체제 과시인데 이런 현상이 하나도 안 보입니다, 현재 화면으로 봐서는.

[앵커]
북측의 리근숙 할머니와 그 동생들 상봉 장면을 보고 계십니다. 전쟁 후에 연락이 끊겼는데 어머니께서는 통일이 되면 누나에게 리근숙 할머니에게 주라면서 자수를 남기셨다고 합니다.

리근숙 할머니가 봉직공장에 간다고 14살에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집에 자수를 남기고 갔대요. 이거를 어머니께서 간직하고 있다가 리근숙 할머니를 만나게 되면 전해주라고 형제들에게 남겼다고 합니다.

당시에 14살이었는데 84살이 되어서야 만났습니다. 70년 만에 만났으니 얼마나 그리웠겠습니까.

리근숙 할머니 생일이 칠월칠석인데 어머니가 칠월칠석만 되면 정안수를 떠놓고 기도드렸다고 합니다. 사전에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이 자수가 되어져 있는 하얀색 천이 누렇게 바랬다 이런 얘기가 있더라고요.

이번에는 북측의 리복만 할아버지의 가족 모습 보고 계신데요. 여동생 세 분과 남동생 한 분을 만나러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다. 현장음 함께 들어보실까요.

리복만 할아버지. 북측의 가족과 함께 나와서 남측의 형제, 남매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기자]
사실 21차인데 2000년 8월 15일 1차를 계산해서 지금까지 21번의 만남인데 지금까지 상봉하신 분들이 2000명이 채 안 됩니다. 신청은 우리를 기준으로 해서 13만여 명이 신청했는데.

[앵커]
저 자수가 인터뷰에서 봤던 그 자수를 했던 천인 것 같습니다. 14살에 집에 남기고 갔던 자수가 담긴 천입니다. 이걸 기억하냐고 물어보고 싶다. 가족들이 그런 얘기를 했었는데 지금 물어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뷰]
저것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 깊숙이 매번 그리움으로 사무쳐 있었을까 하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생각이 드네요.

[앵커]
70년 만에 자수를 건네주게 됐습니다. 눈물이 마르지 않는 모습인데요. 지금 저 자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요? 아마 계속해서 옛날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족들의 사전 인터뷰 내용을 보면 리근숙 할머니가 북한에서 간호장교를 했다고 전해들었다. 이런 인터뷰를 하셨더라고요. 아무래도 북측에 있는 가족들이 혹시나 고생을 하지 않을까, 힘들게 살지는 않았을까. 이런 부분들을 많이 걱정을 하는 그런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간호장교를 했다니까 그래도 잘 살았던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가족들이 이런 인터뷰를 했습니다.

[기자]
그동안 이질적으로 삶았다고 해도 지금까지 70여 년 만에 만나는 분의 감정은 다르죠. 그런데 70년을 기준으로 시간을 계산하면 61만 3200시간됩니다. 그런데 그중에 12시간, 11시간 이렇게 만나는 거죠.

[앵커]
동생분께서 누님이 건강하신 게 참 고맙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모든 가족들에게도 다 적용되는 말일 텐데 건강히 잘 살아계신 것만 해도 가장 감사한 일 아니겠습니까.

[인터뷰]
그렇죠. 건강해서 살아계시니까 이렇게 만날 수 있다라는 거죠. 생사 확인을 한 것도 기쁘지만 결국 건강이 뒷받침 되니까 이 만남이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리복만 할아버지 가족의 상봉 장면 보고 계신데요, 테이블 위에 무엇을 많이 올려놓으셨네요.

[기자]
달고 오지 않았는데 케이스에 담아왔네요. 북에서 내가 이렇게 살았다라는 걸 아마 삶의 궤적을 보여드리는 것 같습니다.

[앵커]
지금 보여드리는 가족들은 림홍수 할아버지의 가족들이었습니다.

[기자]
지금 최고령자 할머니죠. 강정옥 100살된 할머니를 만나는 거죠.

[앵커]
자매 간의 만남입니다. 1번 테이블 위에서. 오른쪽이 북에서 사는 강정화 할머니고요. 왼쪽이 최고령 할머니 100세이신 강정옥 언니 되시죠. 지금 가운데 파란 옷은 딸입니다.

강정옥 할머니께서 이번에 상봉이 성사됐다, 이 얘기를 듣고 나서 우리 정화는 아직도 17살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네요.

[기자]
기억이 거기서 멈추는 거죠.

[앵커]
동생 만나면 무슨 말하고 싶냐, 이런 질문도 있었는데 어떤 얘기를 나누는지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기자]
제주 한림읍에 사셨나봅니다. 한림읍 얘기를 자꾸 하죠.

[앵커]
태풍 때문에 제주도에서 올라올 때 걱정이 많으셨다고 하더라고요. 동생 만나면 무슨 말을 하고 싶느 냐이런 질문을 사전에 기자들이 드렸었는데 한동안 답을 못 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반가운 말만 해야죠. 기쁜 말만 해야죠. 눈물이 나서 말을 못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6.25가 터진 이후에 연락이 끊겨서 못 보다가 이제서야 만났습니다. 그간 하고 싶던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당시에 부모님께서 딸이 사라졌으니까 어디에 있는지 백방으로 알아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못 찾았고 북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가족들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인터뷰]
이런 사례에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볼 수 있는 것처럼 생사여부를 빨리 확인하는 것부터 필요하다라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

지금 이산가족 잠깐 말씀하셨지만 13만 명이고 지금 상봉 못한 사람이 5만 6000명 정도 되고 더 심각한 문제는 그중 90세 이상이 지금 만 2000명 정도 되거든요. 21%가 90세 이상이라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단 1차적으로 생사여부를 빨리 확인하고 화상상봉이라든지 오늘같이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그런 형식으로 또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그런 형식의 만남이시급하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자]
특히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결심만 있으면 지금 박원곤 교수께서 말씀하셨던 생사여부 확인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북측도 호적정리가 굉장히 잘되어 있고요.

우리도 호적정리가 잘되어 있고 동서독 경우를 보면 고향, 같은 동일한 단어를 교집합을 찾아내서, 지금 컴퓨터가 더 발달했지 않습니까. 굉장히 전문가들 이야기 들어보면 실무자들이 관여만 하면 남북 실무자들은 석 달이면 다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김정은 위원장의 의지, 결단이 필요한 것이죠.

[인터뷰]
결국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이것이 진행이 계속 안 되는 이산가족 상봉이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화상상봉 같은 경우에도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저희가 진행이 됐었습니다.

그리고 화상상봉장이 지금 남측과 북측에 약 20개가 마련되어 있죠. 그래서 언제든지 다시 활용을 할 수 있는데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중단된 그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이산가족 상봉은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과 별개로 당연히 이건 인륜의 문제이고 당연히 인도주의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지속되는 것, 방금 김주환 기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은 한국과 북한의 정치적인 결단을 통해서 계속 지속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상시적으로 만날 수 있는 시설은 지금 다 되어 있는 거죠?

[기자]
다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문재인 대통령께서 거듭 말씀하셨지만 금강산 상봉장, 저걸 상시화하거나 서부 쪽은 개성공단이라든가 이 일대. 지금 역설적으로 군사회담 관련해서 판문점을 비무장화하는 데 그것이 보다 긴장 완화의 방안으로 나오면 판문점 일대를 상봉장으로 만들 수도 있는 문제도 있고요.

[앵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지금 만나는 가족들은 북측의 윤병석 할아버지와 남측의 조카들입니다. 작은아버지를 남측의 조카들이 만났습니다. 사전 인터뷰 내용을 보니까 돌아가신 아버님이 살아 돌아온 것 같다. 이게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어떤 얘기를 나누는지 들어보겠습니다.

[앵커]
말씀을 나누시지 못할 정도로 계속해서 눈물을 많이 흘리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인터뷰]
연세가 91세 되셨으니까 북측의 윤병석 할아버지가. 남측에 있는 형제들을 찾았겠죠. 그러다가 결국 형제들은 사망을 했으니까 조카들을 만나는...

[기자]
부자상봉이죠. 유일한 부자상봉이죠.

[앵커]
건강하게 살아계셔서 고맙습니다. 남측의 조정기 할아버지. 지금 북측의 아버지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입니다. 아무 얘기도 못 나누고 눈물만 흘리고 계시네요.

[기자]
사실은 여러 시청자 분들께서 지켜보는 분들이 굉장히 많은데 거듭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한국전쟁 때 월남자가 한 300만 명 된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하신 분들이 그런데 2000명이 채 안 된다고 했는데 90년대 이후로 제3국에서 만난 게 3300...

[앵커]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고 말씀하셨는데 또 어머니께서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나신 것에 대해서 굉장히 안타까워하시는 모습 볼 수 있었습니다.

[기자]
80번 피순애 할머니께서는 사실 파주에서 여맹위원장을 하다가 월북해서 동생들을 만나는...

[앵커]
지금 형제, 자매, 남매간 그리고 부자간의 상봉까지 단체상봉 하는 모습을 함께 보셨습니다. 오늘부터 시작된 2차 상봉 2박 3일 동안 진행되는데요. 저희가 관련 내용 계속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두 분 고맙습니다.

[앵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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