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누드화'가 질 낮은 패러디인 이유

'박근혜 누드화'가 질 낮은 패러디인 이유

2017.01.24. 오후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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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누드화'가 질 낮은 패러디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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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잠'은 국회 의원회관 1층에서 진행 중인 '곧, Bye! 전'에 출품된 그림이다.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올랭피아'를 패러디해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 실세' 핵심 인물로 꼽힌 최순실 씨를 풍자하기 위해 제작됐다.

그러나 이 작품은 '박근혜 대통령을 여성의 나체'에 합성해 논란이 되었고 더불어민주당과 새누리당, 국민의당 등은 표 의원을 윤리위에 제소하겠다는 입장까지 밝힌 상태다.

표창원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그림은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그림은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속하지 않는다를 떠나서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효과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수준 미달의 작품이다.

'박근혜 누드화'가 질 낮은 패러디인 이유

▲ 조르조네 〈잠자는 비너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마네의 올랭피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83년 에두아르두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고, 남성적 시각에서의 여성의 육체 그림을 소비가 절정이던 시기에 반기를 든 그림이다.

당시는 '살롱'을 중심으로 아카데미 누드가 철저하게 남성 중심적 시각을 구현하고 있던 시기였다. 누드화의 주제 역시 '비너스'와 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익명의 여신으로 여성의 육체를 타자화해 소비하는 (남성이 보기에)불편하지 않은 누드화였다.

마네가 노골적으로 패러디한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와 비교해보면 그 의미를 더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조르조네의 비너스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비스듬이 누워있다. 절대로 그림 밖 청중에게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수동적인 자세는 '보여지는 존재인 여성'으로 소비되던 당시의 누드화의 경향을 보여준다.

'박근혜 누드화'가 질 낮은 패러디인 이유

▲ 에두아르두 마네 〈올랭피아〉
반대로 마네의 올랭피아는 '점잖은 남성 신사들'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저 창녀'"로 익명성을 벗고, 동시대의 '파리의 창녀'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관람자인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불편함과 불쾌함을 유발했다.

수줍은 듯 내리깐 눈으로 자신의 육체를 감상하는 관람객에게 부끄러움을 어필하지 않는 새로운 존재 올랭피아, 누드를 감상하려는 (남성) 청중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눈빛은 당시 누드화의 타자성과 결별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전통적인 관람자의 시선과 타자화를 거부하고, 관람자의 지배력까지 거부하는 올랭피아를 패러디한 박근혜의 얼굴을 넣은 '더러운 잠'을 다시 살펴보자. 이 그림은 마네가 올랭피아가 결별한 수동적인 여성 누드, 타자에게 길들여진 여성의 육체를 다시 불러온다.

'표현의 자유를 지향하는 작가 모임'이 그린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은 눈을 아래로 내리깐 표정이다. 원작의 그림처럼 박근혜 대통령이 똑바로 청중을 바라보았다면 아마도 오래 쳐다볼 수 없는 불쾌한 그림이 된다는 걸 알고 일부러 눈을 아래로 내리깐 사진을 골랐을 것이다.
덕분에 이 그림의 누드는 '관음용' 누드로 전락했다. 외설이 아니었던 그림을 외설스럽게 만든 효과를 내버린 것이다.

'누드로 관람객의 시선을 마주칠 수 없는 수줍은 박근혜 대통령' 이 그림이 박근혜 대통령을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는 것 외에 어떤 효과를 낳을 수 있겠는가? 원작이 결별한 관음증적 회화로 돌아온 '더러운 잠'이 과연 유의미한 전복적 표현이 될 수 있을까?

[그림 1 = 이구영, 더러운 잠
그림 2= Giorgione, 〈Sleeping Venus〉,1510, oil on canvas,108×175cm, Dresden State Art Collections.
그림 3= Edouard Manet,〈Olympia〉,1863 ,oil on canvas,130.5×190cm, Museed'Orsay at Paris.]

YTN PLUS 최가영 모바일PD
(weeping07@ytn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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