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환의 안보이야기-11] 북한-파키스탄의 핵 밀거래, 그리고 중국의 묵인

[김주환의 안보이야기-11] 북한-파키스탄의 핵 밀거래, 그리고 중국의 묵인

2017.01.16. 오전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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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환의 안보이야기-11] 북한-파키스탄의 핵 밀거래, 그리고 중국의 묵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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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5월11일. 인도가 핵실험을 실시했다. 1998년 5월30~31일. 파키스탄 역시 핵실험을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 해 6월 7일.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북한 국적의 김신애(당시 54세)가 괴한들에 의해 피격당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김신애의 암살에는 북한과 파키스탄의 핵 밀거래를 막아보려는 인도 정보부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당시 북한 대사관의 경제담당 참사관이자 북한의 무기 수출을 주된 임무로 했던 ‘창광무역’ 대표인 강태윤의 아내였다.

[김주환의 안보이야기-11] 북한-파키스탄의 핵 밀거래, 그리고 중국의 묵인

1998년 7월 5일, 당시 북한의 군수담당 책임 비서였던 전병호는 강태윤에게 서한을 보냈다. 내용은 “제항기르 카라마트(Jehangir Karamat) 파키스탄 육군 참모총장에게 건넬 미화 300만 달러, 줄피카르 알리 칸(Zulfiqar Ali Khan) 공군 참모총장에게 줄 50만 달러와 다이아몬드 및 루비 3세트를 보냈으니 이를 전달하라”는 내용이었다.

제항기르 카라마트는 훗날 주미 파키스탄 대사를 역임(2004년~2006년)했다. 미 조지타운대 핵 전문가인 매튜 크로닉(Matthew Kroenig)교수는 자신의 논문 『Exporting the Bomb: Why States Provide Sensitive Nuclear Assistance, 2009』에서 카라마트 대사에게 북한에 핵물질을 제공한 이유에 대해 묻자 “북한의 핵능력이 파키스탄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North Korean nuclear capability does not threaten us directly)이다”라고 답변했다고 밝히고 있다.

다시 시계바늘을 1998년으로 되돌려 보자. 그 해 파키스탄은 북한에 식량 3만 톤을 무상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김신애가 피격 당한 3개월 후쯤인 1998년 9월22일, 제1차 지원분 1,400여 톤의 식량을 실은 배가 북한 남포항에 입항했다. 이날 북한 중앙방송은 “파키스탄은 1996년에는 5천 톤의 쌀과 16만 달러 상당의 원조물자를 지원했고, 1997년에 2천 톤의 쌀을 지원한 바 있다”고 보도했다.

이후 2001년 1월22일 파키스탄 카슈미르주에서는 북한의 지원으로 건설된 수력발전소 준공식이 열렸다. 또 그해 5월29일에는 북한 공군사령관 오금철 상장을 비롯한 5명의 북한군 대표들이 파키스탄을 방문해, 파키스탄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을 만났다. 당시 파키스탄 공군은 “이번 북한 대표단의 파키스탄 방문은 양국 간 방위관계 구축에 돌파구를 제시한 면이 있다”고 발표했다.

이렇듯, 1998년은 북한-파키스탄의 전략적 동반자((strategic partnership) 관계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왜 그랬을까? 1990년대 초 냉전이 종식됨에 따라 북한과 파키스탄 양국 모두 자신들의 전략적 후견국이 소실되는 전략적 취약성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소련의 소멸로 전통적 후원국을 잃은 채 홀로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여겼다. 파키스탄 역시 인도 등 주변으로부터 더 극심한 안보 위협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다. 두 나라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한데는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파키스탄은 탈냉전 후 미국의 ‘프레슬러 수정안(Pressler amendment)’의 강화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북한 역시 수년째 미 국무부의 테러 지원국에 포함되어 각종 제재를 받아왔기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상황이어서 이를 보완하고자 협력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미국의 핵 전문가인 헨리 소콜스키(Henry Sokolski)는 “핵폭탄을 보유한 파키스탄은 북한의 미사일이 필요했지만 자금이 없었다. 미사일을 보유한 북한은 핵무기를 원했다”면서 자연스럽게 핵-미사일의 교환이 이뤄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눈여겨 봐야할 부분은 앞으로도 파키스탄과 북한이 핵 밀거래(Nuclear Swapping)는 아니더라도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데 있다. 파키스탄은 (자국의) 대중국 관계를 위해서라도 북한과의 관계를 지속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파키스탄이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는 시기에도 친북한 정책을 유지하는 것을 은밀하게 지지했다. 북한-파키스탄의 핵 밀거래를 묵인했던 것이다. 미 의회조사국의 칸(Shirley A. Kan) 박사는 “1990년대 말 파키스탄의 대북 핵기술 지원은 중국의 대파키스탄 핵 프로그램 지원 시기와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는 중국에게 있어 파키스탄의 전략적 중요성이 배가(倍加)되고 있던 때였다.

중국은 파키스탄을 통해 북한에 핵 관련 설비들을 제공해줌으로써 미국과의 마찰 없이도 북한의 군사력을 증강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국제사회가 파키스탄을 제재하는 기간에도 중국은 파키스탄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런 배경 하에 (2017년 1월 현재) 파키스탄의 나와즈 샤리프 정권이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끊는다면, 중국은 파키스탄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에 동참하는 방식으로 파키스탄을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파키스탄은 핵공급 그룹(NSG) 가입을 희망하고 있다. 반면,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인도의 NSG 가입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파키스탄은 중국의 적극적인 지지가 필요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파키스탄은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끊는 방식으로 중국을 곤란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이런 삼각 구도가 가능했고, 지금도 가능할까? 파키스탄이 주적으로 여기고 있는 인도는 중국을 잠재적인 경쟁국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인도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나라가 중국이었다. 1959년 8월 중국과 인도가 영토전쟁을 벌였는데 인도가 패배했다. 그리고 1962년 10월 또다시 영토문제로 중국-인도간 전쟁을 벌였으나, 역시 인도가 열세인 가운데 끝을 맺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64년 10월 중국은 핵실험을 성공시켜 초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인도는 이에 자극을 받아 핵개발에 나서 10년 후인 1974년 1차 핵실험에 성공했고, 24년 뒤인 1998년 2차 핵실험에 이어 핵보유국을 선언했다. 인도는 지난 2003년 1월5일 전략핵사령부(NCA)를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앞서, 1998년 당시 3월부터 김대중 정부의 대북 송금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국민의 정부 5년 동안 3억 4천 500만 달러(약 1조5천억 원)가 북한에 건네졌다. 당시 펼쳐진 ‘햇볕정책’에 우리 국민은 북한-파키스탄의 핵 밀거래의 진실을 몰랐다. 아니, 특정 세력에 의해 진실을 향한 눈이 가려졌는지도 모른다. 지난 2002년 10월 24일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당시 신건 국가정보원장은 “1999년 3월 북한인 3명이 파키스탄의 칸연구소에 파견됐다는 첩보가 입수돼 미국과 함께 북한 핵개발에 관한 첩보를 추적했다. 얼마 후 북한이 가스 원심분리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초합금을 수입한다는 첩보가 있어 미국 정보기관과 함께 이를 차단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로는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원폭을 개발한다는 결정적인 정보가 없어,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1998년 그 해 우리 국가정보원이 주력한 것은 남북관계의 복원이었다고 한다. 한 소식통은 “1998년과 1999년 국정원은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 차관회담에 전력을 기울였다. 1999년 6월 발발한 연평해전으로 남북관계가 끊어진 다음에는 더욱 남북관계를 복원하는 데 집중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열리게 하였다. 당시 국정원에 하달된 과제는 김대중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남북관계를 복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북한-파키스탄 커넥션에 대해 철저하게 추적하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말이 있다. “모르고 했다면 부실한 것이고, 알고 했다면 불량스러운 것이다.” 지금 북한의 핵은 수술도 할 수 없는 커다란 종양이 되었고, 그 종양은 점차 커지고 있다.

[김주환의 안보이야기-11] 북한-파키스탄의 핵 밀거래, 그리고 중국의 묵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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