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미사일개발연구원 17년 출입기자의 증언

北 미사일개발연구원 17년 출입기자의 증언

2016.09.30. 오후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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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길선 / 北 미사일개발연구원 17년 출입기자

[앵커]
뉴스인에서 오늘 초대한 분은 북한 황장엽 노동당 비서, 김덕홍 노동당 부실장 비서를 지냈고요.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하고 연구하는 곳 제2자연과학원을 유일하게 북한에서 출입하는 기자였던 김길선 씨입니다. 1990년대부터 제2자연과학원에서 핵과 미사일 개발을 했었던 과정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오늘 들으려고 합니다.

우선 이 제2자연과학원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지난 3월 저희 YTN 김주환 정치안보 기자가 했었던 리포트로 잠깐 보시겠습니다.

[기자]
북한에서 '제2'라는 명칭은 주로 군사 관련 시설에 붙여집니다.

군수 경제를 관장하는 조직이 '제2 경제위원회'라 불리는 것이 비슷한 사례입니다.

이번에 추가 제재대상에 오른 제2 자연과학원은 북한의 미사일 관련 연구뿐만 아니라 북한군의 현대화 관련 업무를 주로 맡고 있습니다.

제2 자연과학원의 대표 기관은 로켓엔진을 주로 담당하는 628 연구소를 포함해 연구소만 60여 곳, 연구원 15,000여 명이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이 지난 1월 8일 공개했던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 SLBM은 166공학연구소에서 주로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특히 북한의 미사일 발사체를 주로 연구하는 166연구소나 628연구소에 옛소련의 과학자 10여 명이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과거 소련 붕괴 당시 북한에 망명한 것으로 알려진 이들은 1990년대 중반 북한의 노동미사일 개발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제2 자연과학원 원장은 장창하라는 인물이 맡고 있는데, 과학원 원장은 '대장' 칭호를 받습니다.

[앵커]
그러면 김길선 씨의 증언 들어보겠습니다. 어서오십시오.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2자연과학원을 저도 오늘 사실 처음 들어봤는데요. 거기에 출입하는 기자셨다고 하셨는데 북한에도 그런 기자가 있는 모양이죠, 출입하는 기자가?

[인터뷰]
제2자연과학원 중에 많은 연구소들이 있는데 그중에 제2자연과학출판사라는 게 있어요. 제2자연출판사가 바로 제2자연과학원에 행정적으로 소속돼 있어요. 정책 지도는 노동당에서 받고. 그런데 제2자연과학원 출판사의 주 임무는 군수부문, 그다음에 핵부문, 국방과학부문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의 사상 세뇌, 정치선동 또 거기에서 종사하는 과학자, 기술자들의 과학기술질 향상을 위한 모든 과학기술 자료들을 보급하는 그런 일을 하는 곳이에요. 북한 사람들도 잘 몰라요. 그런 걸 요구하는 줄 아는데 제일 중요한 곳입니다.

[앵커]
그러니까 연구소의 사무처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군요?

[인터뷰]
사무처도 아니죠. 사무처는 따로 있고.

[앵커]
거기에 기자를 출입하셨다는 거죠?

[인터뷰]
저는 제2자연과학출판사 정책편집부 기자로 17년간 근무했어요.

[앵커]
그러니까 매체에서 파견된 기자가 아니라 거기에 소속돼 있는, 내부에서 내부를 다 들여다볼 수 있는 거군요.

[인터뷰]
그런데 같은 내부라도 북한은 비밀보장을 위해서 같은 출판사라도 매 부서가 다 출입금지로 돼 있어요. 그런데 제2자연과학원 미사일 개발팀과 제가 연계를 맺은 것은 1984년 10월 25일인가 24일날 김정일이 과학원을 처음으로, 아이 때 한 번 와보고 그때 지도자가 돼서는 처음 와봤죠. 84년에 그때 현지시찰을 한 다음에 과학자돌격대라는 게 생겼어요. 과학자 돌격대라는 것은 곧 돌격대원들을 세뇌하기 위해서 기자들이 무조건 참가해야 돼요. 그 출입기자로 유일하게 제가 간택이 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진짜 탈북하는 날까지 계속 거기를 들락날락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잘 알죠. 거기 과학자들도 눈에 선하고.

[앵커]
탈북하신 것이 1999년인가요?

[인터뷰]
97년도입니다.

[앵커]
그러니까 13년, 14년 동안 거기에 출입하셨군요?

[인터뷰]
그렇게 됐죠.

[앵커]
거기에 출신 성분이 아주 좋아야 거기를 들어갈 수 있나요?

[인터뷰]
그렇죠. 원래 제가 70년대 말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저는 이 자연과학원 군수부문을 그때만 해도 북한 사회에서 기피 대상이었어요. 왜냐하면 거기에 들어가면 평생 나오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비밀기관이기 때문에. 그런데 저는 정말 거기만은 가기 싫었는데 그저 노동당에서 무조건 거기로 배치한 거예요. 그 정책적 근거가 대대손손 정책에 걸려서. 우리 아버지가 처음 군보위부에 들어갔을 때 제일 처음에 담당했던 게 국방과학원을 담당하셨다고 하셨어요.

말하자면 비밀경찰로서 군 보위부에서 파견근무를 나가계셨고 저희 어머니는 그때 제2자연과학원 금속자료연구소 화학분석기사였어요. 두 분이 제2자연과학원에서 복무를 했죠.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거기서 복무했으니까 너는 무조건 가야 된다는 거예요, 거기에. 그래서 제가 거기에 배치받은 거예요. 그 안에서도 또 그 성분이 좋아서 미사일 개발팀에 들어간 거고. 엄격하거든요. 아무나 못 들어가요. 비밀보장을 위해서.

[앵커]
그러니까 명분은 대대손손이라는 것이지만 검증됐다고 본 거군요, 충성심이나 출신성분이나 검증이 됐으니까 거기에서 일하게 시킨 거군요? 김일성대에서는 무엇을 전공하셨습니까?

[인터뷰]
저는 어문학부 고전문학부를 나왔어요.

[앵커]
자연과학이 아니었네요.

[인터뷰]
아니죠. 그런데 자연과학 부문에서는 정책기자는 못 하니까 어문학부, 정책기자였으니까 제가 갈 수 있었던 거죠.

[앵커]
정책기자라는 것은 어떤 역할을 하는 건가요, 그 안에서?

[인터뷰]
김일성, 김정일 노동당 정책이 나오면 관철을 하기 위한 선동자료, 강연자료. 말하자면 주민 세뇌 선동용 글을 계속 써내는 거예요. 그건 모든 정치사업의 선행이라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그 기자들은 쉬지도 못 해요, 일을 안 해도. 뭐가 떨어져도 계속 하고 지시 사항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하루도 빠짐없이 나와요. 나오기만 하면 또 쓰고 또 달려나가서 취재하고. 그런 일을 했죠.

[앵커]
우리가 생각하는 이쪽의 기자와는 좀 다른 일을 하신 것인데. 그래서 84년도 그 당시부터 미사일 개발 연구원을 출입하시면서 그때도 북한이 미사일 개발에 그렇게 혈안이 돼 있는 상태였습니까, 그때도?

[인터뷰]
북한이 미사일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우리 과학원 과학자들이 그 미사일 개발에 목을 매게 된 건 81년도경부터예요. 81년 사료에 의하면 81년 정월 초하루에 김정일이 노동당 군수담당 비서를 부르는 거예요. 그때 아마 연행무기였을 거예요. 불렀는데 소련도 우리한테 미사일을 더 안 주겠다고 하는데 우리 자체개발을 해야 되겠다고 해서 구 소련제 스커드미사일을 모방설계해서 빨리 한번 해보라,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그때로부터 북한에서 소위 미사일 개발 역사가 시작된 거예요.

그다음에 스커드 미사일을 82년도인가 83년도에 성공을 시킨 거예요. 그다음에 84년 10월달에 김정일이 아까 말씀을 드린 것처럼 처음으로 과학원을 찾은 거예요, 성인이 돼서는. 그때 녹음교시니까 녹음을 들으면서 다 발취를 하거든요. 이제 그걸 개발한 걸 보니까 너희는 창작할 수도 있겠다, 말씀이 그렇게 돼 있어요. 과학자들에게 창작을 맡겨도 되겠다.

[앵커]
스커드 모방은 다 했으니까 새로 만들 수도 있겠구나.

[인터뷰]
그 기술이면 창작할 수도 있겠다, 너희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 너희가 여태까지 개발한 것을 1, 2, 3을 올려세우면 그게 바로 중거리미사일이 된다, 로켓이 된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창작설계로 들어가라. 그러니까 창작설계였던가 봐요. 그래서 그때부터 노동미사일 개발에 들어갔죠.

[앵커]
중거리 미사일, 노동미사일이 그때부터 시작된 거군요.

[인터뷰]
노동미사일. 그때부터 시작했죠. 하여튼 81년도 김정일 지시 이후 우리 과학원 자체가 그저 미사일에 총역량을 집중했어요. 그게 그저 대의명분이고 그렇게 된 거죠.

[앵커]
총역량을 집중했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 금전적인 지원이나 이런 것들이 다 충분하게 이루어진 건가요?

[인터뷰]
네. 그렇죠. 우선 북한 시스템상 김정일의 중요지시가 내려지면 우선 돌격대를 모아요. 돌격대가 뭐예요. 목숨 내놓고 나가는 거예요. 그때 과학원에서 제일 처음 나온 돌격대가 10월 24일 과학자 돌격대였어요. 10월 24일 과학자 돌격대의 하나밖에 없는 임무는 중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시작돼서 과학자돌격대에 나 같은 기자들이 가서 매일같이 글 쓰고 자료가 있으면 홍보해 주고 또 지시내려오면 또 하고. 이런 식으로 하고 그다음에 중앙당에서는 기계공업부에서 99호선을 통해서 로켓개발에 필요한 전자 부품들을 다 수입을 해서 보장하고 과학자 우선 보장하고 하여튼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인적, 재정적 모든 지원은 최우선적으로 보장을 해 줬어요.

[앵커]
우리가 91년에 남북이 비핵화 선언을 한 다음에 알고 보니까 92년에 북한이 핵개발을 상당 부분 해 놨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졌었는데 그 당시에도 핵개발이 시작됐었나요?

[인터뷰]
그렇죠. 제2자연과학원이 1964년 6월에 생겼는데 그때만 해도 우리 과학원 안에 핵 연구소가 들어와 있었어요. 그러다가 분할돼 나간 게 76년도인가 완전히 독립해 나갔어요, 우리 과학원에서. 나가서 별도로 됐죠. 그러니까 당 군수공업부에 제2경제위원회, 제2자연과학원, 영변핵연구소가 누가 선두랄 것도 없이 직속돼 있어요. 그런데 그때 나갔는데 그때도 그 과학자들이 연구원에 자주 다녔죠. 그때도 핵개발을 충분히 했어요.

[앵커]
핵개발이라는 것이 평화적인 핵개발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건 다른 나라들도 하는 것인데 그 당시 과학원 안에서, 과학자들끼리도 그것이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것이다라는 것이 암묵적으로 그걸 다 알고 있었습니까?

[인터뷰]
그렇죠. 국방과학원에서 핵무기 아니면 민간전기를 생산하겠다고 그걸 해요? 그건 아니죠, 국방과학원이니까. 그건 물어볼 필요도 없는 거죠.

[앵커]
미사일이 그래서 선생님이 보실 때까지는 어느 정도 수준까지 개발된 걸 보신 건가요?

[인터뷰]
그때 화성 6호 개발에 들어가서 화성 6호가 거의 완성됐다고 할 때. 지금 말하자면 대포동미사일이에요. 여기서 붙인 건.

[앵커]
대포동이니 노동이니 하는 것은 우리 쪽이나 미국에서 이름 붙인 거고 북한에서는 화성이라고 하는군요.

[인터뷰]
김정일이 직접 붙여준 이름이에요. 여기다 밀고 쏘는 무기들 있잖아요, 비행기 쏘고. 그건 화승총 계열로 부르고 미사일은 화성 계열로 불러요.

[앵커]
이름을 지어줬군요. 화성이라고. 단거리든 중거리든 화성 계열로 가는 겁니까?

[인터뷰]
보아하니까 저번에 로켓 성공한 것이 화성 9호라고 했던가? 북한이 그렇게 공포한 것 같더라고요.

[앵커]
화성이 무슨 뜻입니까?

[인터뷰]
모르겠어요. 즉흥적으로 붙였는지 어쨌는지. 하여튼 화성이라고 했으니까 화성이겠죠. 김일성이 붙인 거니까. 무슨 의미를 가지고 붙인 건지 그건 통보받은 기억이 없어요.

[앵커]
최근에 ICBM이 거의 완성단계에 있다고 하고 중거리미사일은 시험발사에 성공했고 그때 미사일 개발은 어느 정도까지 가 있었습니까?

[인터뷰]
제가 있을 때만 해도 화성 5호부터 창작설계에 들어갔다고 보면 화성 5호가 제일 힘들게 개발된 무기예요. 처음에 하니까 김정일이 자기 성미 그대로 매일 닦달하는 거예요. 과학자들이 동지 큰 걸 놓고 다 매 연구소 부서별로 몽땅 뜯어서 맡은 거예요, 연구과제들을. 그래서 완전히 기술문건을 갖출 새도 없이 어쨌든 어떻게 어떻게 쓸고 닦고 해서 화성 5호를 만들어놨어요. 만들어 놓고 보니까 이건 기술문건이 없는 거예요.

화성 5호를 시험발사탄이라는 것은 만들어놨는데 이걸 양산하자면 문건이 준비돼야 될 거 아닙니까. 개발 과정에 있었던 일, 그걸 개발할 때 모든 기술 지원들 그다음에 모든 디테일한 게 하나의 병기심사문건으로 구비돼야 그 후에 개발능력을 정말로 갖췄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그게 하나도 안 된 거예요. 그러니까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죠. 개발탄 시험발사탄은 89년 11월달까지 만들어놨는데 이제 양산준비 들어가라 하니까 지도자 동지, 그렇게 할 형편이 못 됩니다라고 된 거예요.

그래서 왜 그렇게 됐냐고 하니까 기술문건이 구비가 안 됐다고 하니까 김정일이 자기가 한 건 생각을 안 하고 참 유명한 명언을 남겼죠. 우리 국방과학자들이 화장을 할 줄 모르는 처녀들처럼 뒤죽박죽으로 연구사업을 해놔서 탄이라는 것은 만들어놨는데 아무 쓸모없게 만들어놨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한 거예요. 김정일이 말한 것을 제가 직접 들은 거예요. 화장을 하자면 첫째로 로션, 살결물을 바르고 밑크림을 바르고 뭘 또 바르고 뭘 또 바르고 해야 화장이 완성되는데 이것은 거꾸로 해 놨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그럴 수밖에 없던 게 화성 5호를 개발할 때 즉 노동미사일을 개발할 때 84년 10월달부터 시작이 됐는데 87년 4월달에 김정일 과학원에 또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87년 그러니까 3년 후에 또 나왔는데 그때는 왜 나왔냐면 화성 5호를 개발하는 데 지상연동시험이라는 게 있대요. 아마 발동기 추진력 시험인지. 그게 성공했다는 보고를 듣고 나온 거예요, 과학원에. 그때 나와서 한 말이 그것이 성공했으면 이건 다 된 것과 같다. 이제는 그건 이렇게 이렇게 준비를 해 나가고 이제부터 위성 하자, 이렇게 된 거예요. 이빨도 막 안 났는데 막 먹인 거예요.

[앵커]
위성이라는 게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그때 벌써 얘기했군요.

[인터뷰]
87년 4월 11일에 나와서 얘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3년 후에. 그러니까 과학자들, 10월 24일 과학자 돌격대가 멀쩡히 있는데 또 새로운 과학자 돌격대가 모아진 거예요. 4월 11일 과학자 돌격대라고. 그러니까 그 시스템이 우습게 돼 있어요. 과학자는 하나인데 얘가 쓰고 있는 감투가 10월 24일 과학자 돌격대, 4월 11일 과학자 돌격대,11월 17일 과학자 돌격대 등등 감투를 여러 개를 쓰고 있어요. 미사일 개발 능력은 뻔하지 않습니까? 과제에 따라서 그렇게 조직하니까, 돌격대를. 그러다 보니까 이 모든 게 뒤죽박죽이 돼서 화성 5호가 제일 시간이 오래 걸렸죠. 거의 10년 걸렸을 겁니다, 완성하는 데.

[앵커]
그러니까 지금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김정일이 이미 87년도에 장거리탄도미사일 미국까지 겨냥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때 지시를 한 게 87년에 지시가 이미 지시가 들어간 거군요.

[인터뷰]
87년 4월 11일입니다.

[앵커]
그때로부터 30년에 걸쳐서 거의 성공단계에 들어간 거고요.

[인터뷰]
조선 속담에 서당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했어요. 온 군력을 동원해서 10년, 20년 이제 와서 완성을 했다면 별 볼일도 없는 거 아닙니까? 한국 같으면 위험성을 배제해 놓고 본다면 그렇게 봐도 무방할 것 같아요.

[앵커]
그래서 김정일의 녹음교시로 받아 쓰시고 했다는데 녹음교시가 어떤 식으로 어떻게 내려옵니까?

[인터뷰]
김정일이 과학원을 방문하면 과학원 원장, 책임비서, 조직비서 몽땅 녹음기를 들고 있어요. 그리고 김정일을 수행해 온 사람도 들고 있어요. 들고 김정일이 이야기하는 것을 다 잡아요. 잡으면 중앙당에서 내려와서 녹음한 사람은 그걸 가지고 올라가요. 중앙당 선전부에 교시 말씀 편찬하는 전문 부서가 있어요. 거기서 김정일은 영감 저새끼 말한 것을 거기서는 오 동지가, 이 동무들이. 아주 점잖게 개조돼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과학원은 과학원대로 중앙당 선전부에 들어가서 교신 말씀 책자로 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상당히 걸려요.

그런데 정치사업이라는 것은 오늘 왔다 갔으면 내일부터는 들어가는 거예요. 과학자들은. 그러니까 과학원들은 그걸 편집하는 거예요. 그러나 국가가 인정하는 것은, 당이 인정하는 건 노동당이 한 것만 인정을 하니까 우리는 김정일이 말한 거기서 한 문장씩 캐치를 하는 거예요. 글감이 될 수 있는 것. 로켓 속도를 창조하라 그걸 하나 꺼내서 또 쓰고. 이제는 창작 단계에 들어가라고 하면 그걸 또 쓰고. 조선 사람 체형에 맞는 뭘 하라 하면 또 캐내서 또 쓰고 이런 식으로 쓰는 거죠. 거기에 보면 김정일 성격이 적나라하게 알려지죠, 그 테이프만 풀어보면.

[앵커]
육성으로도 들어보셨다는 거네요.

[인터뷰]
그다음에 우리가 녹음을 들을 때는 두서 없이 막 해도 김정일이 명색이 지도자이니까 강력한 독재지도자 아닙니까? 그러니까 모든 말은 막해도 거기에 씨알머리가 다 들어가 있어요. 분명히 주는 메시지가 있어요. 그걸 가지가 우리는 글을 쓰죠. 그러나 며칠 후에, 한 보름 후에 중앙당에서 정식 문건이 내려와요. 분명한 게 이거다. 책자가 내려오면 내가 들은 것과는 차이가 크죠.

[앵커]
그래서 들어보셨으니까 김정일이 어떤 사람이라고.

[인터뷰]
그 사람은 자기가 도깨비 방망이인 줄 알아요. 금나와라 뚝딱이라고 하면 만들어내고.

[앵커]
실제로 만들잖아요.

[인터뷰]
안 만들면 막 잡아가니까. 과학자들이 제일 불쌍하죠.

[앵커]
그러니까 거침없이 얘기하니까...

[인터뷰]
야망이 있는 거예요. 자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야망. 그게 바로 북한의 국가 비전이에요. 그게 뭔가. 김씨 왕조를 연구하고 세습하는 거예요. 그걸 하자니까 아마 그때 제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도 나라 꼭대기에 앉아서 다 보니까 이제는 경제도 별로 회생할 가망이 없고 또 이것도 그저 그렇고 배급도 별로 없고 경제는 나날이 꼬여가는데 내가 이 체제를 유지하자면 뭘 가지고 해야 되겠는가, 생각을 한 것 같아요. 하나는 강력한 사상 세뇌와 독재. 또 하나는 핵미사일을 가져야겠다 이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재래식 무기는 그 전에 다 만들어놨으니까.

[앵커]
선생님이 거기서 취재하신 동안에도 핵무기도 상당 부분 개발이 어디까지 됐다라는 그런 얘기도 그때 들으셨습니까?

[인터뷰]
저는 제13차 청년학생축전이 89년도에 있었는데 제가 90년도 1월달부터 취재기자로 동원이 됐어요. 중앙당 군수담당 비서 전병호. 그분을 따라서 안 간 곳이 없어요. 영변만 빼놓고. 그때 그분이 나를 불렀어요, 아침에. 내가 그분의 책자를 하나 써달라고 해서 찾아갔는데 나를 불러놓고 아침 9시에 들어갔는데 점심시간도 꼬박 굶고 앉아있었어요.

그저 왔다 갔다 하는데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하니까 그게 91도겠구나. 영변에서 영변의 핵 과학자들이 아주 핵무기에서 돌파구가 될 수 있는 중대한 기술혁신을 일으킨 과학연구를 성공시켰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침부터 김정일의 지시가 내려오고 어쩌고 저쩌고 그걸 집행하느라고 이제는 선물도 많이 줘라. 거기에 등록된 사람 모두 컬러TV를 줘라 이런 지시가 내려오니까 그 수령의 지시가 내려오면 즉시 움직여야 되니까 나는 왜 왔는지도 모르고 앉아있더라고요. 그때 내가 아, 뭘 하기는 했다보다. 91년도에 이미 그렇게 됐죠. 그런데 핵사찰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걸렸구나, 위성에.

[앵커]
NPT 핵사찰 말씀하시는 거죠?

[인터뷰]
네.

[앵커]
아까 김주환 기자의 리포트 거기에 구소련 과학자들도 20여 명이 있었고 또 이란하고도 미사일 공동연구를 했다라는 외신보도도 있고 혹시 그런 것도 목격하셨습니까?

[인터뷰]
저는 이란과 공동연구는 제가 그때 현지에 있었던 증인이기 때문에 잘 아는데 이란과 공동연구를 하게 된 배경이 있어요. 아까 말씀하듯이 기술구비 안 되고 그걸 구비하는 것이 과학자의 중심 역량은 또 위성개발에 투입되고 하니까 이게 야단인 거예요. 그때 이란에서 공동개발을 하자고 제의가 들어온 거예요. 누가 먼저 제의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김정일이 돈도 벌고 미사일 개발을 지원해 주면서 거기에서 기술문건을 완성해라, 병기문건을. 그렇게 돼서 90년도 1월달에 평양고려호텔에서 이란 군사대표단이 들어온 거예요. 우리 과학원 대표단이 나가고. 그런데 우리 과학원은 그때만 해도 군복을 뽑고 있었기 때문에 보니까 이란쪽에서 소장이 오고 대장이 오고 이렇게 온 거예요, 계급이. 그러니까 우리 소장이 하루아침에 소장복을 얻어입고 나간 거예요.

고려호텔에 가서 그때 첫 회담을 했죠. 공동 개발에 대한. 그러니까 김정일이 그때 준 지시에 의하면 외화도 벌고 기술문건도 완성하고 우리나라에서 중거리 미사일을 완성해서 시험발사하면 주변 것들이 자꾸 떠들어대기 때문에 못 하겠다는 거예요. 이란에 가서 시험발사 다시 하라. 시험발사까지 하라 이렇게 해서 공동개발에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과학자들이 계속 릴레이로 이란에 계속 나갔죠.

[앵커]
17년 동안 북한 미사일 개발을 내밀한 곳에서 들여다본 김길선 씨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있습니다. 계속 들었으면 좋겠는데 시간은 제한돼 있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시청자 여러분들께서 그래서 97년까지 북한의 그야말로 내밀한 심장부에서 그걸 지켜보셨는데 탈북하신 이유는 뭘까 아마 궁금해하실 것 같은데 그걸 1분 정도 말씀을 해 주세요.

[인터뷰]
제가 탈북한 것은 일전에 책자도 나간 게 있지만 말을 잘못해서, 말을 실수해서 북한식으로 말하면 존엄 훼손죄에 걸려서 보위부에 잡혀가서 40일 동안 취조를 당했어요.

[앵커]
무슨 말씀을 하셨길래.

[인터뷰]
온 세상이 다 아는 성혜림 이야기. 그런데 저는 그 자리에서 처음 듣고 수령이 그러니까 그렇게 했다는 거요? 그걸 들은 죄 때문에 잡혀갔습니다.

[앵커]
그래서 잡혀 계시다가 탈출했지만 여전히 목숨도 불안하고 그런 상황이었군요.

[인터뷰]
목숨 불안한 것 그건 초월했으니까. 40일 동안을 죽느냐, 사느냐 매일 욕만 듣고 나오니까 오만정이 떨어지더라고요, 북한 체제에 대해서. 내가 남은 여생을 이런 나라에서 살 수 없겠다. 그런데 북한 당국이 알아서 국경 추방까지 시켜주더라고요. 그래서 탈북했죠.

[앵커]
알겠습니다. 오늘 생생한 증언, 역사의 증언이었습니다. 김길선 씨 이야기 들어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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