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기 폭파사건 27주기...김현희가 보는 '종북 논란'

KAL기 폭파사건 27주기...김현희가 보는 '종북 논란'

2014.11.28. 오후 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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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이 사진,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입에 재갈을 물고 팔이 묶인 채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여성, 바로 KAL기 폭파범, 김현희 씨입니다.

한국인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사건이죠.

KAL기 폭파사건, 벌써 27주년입니다.

지금 스튜디오에 김현희 씨가 나와있는데요.

그때 당시를 그녀의 입을 통해 재구성해보겠습니다.

벌써 27년이나 흘렀습니다만, 달라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북한의 위협과 도발이 계속되고 있죠.

국제적 이슈인 북한의 인권유린도 점입가경입니다.

수용소에서 탈출한 탈북민들의 증언은 공통적으로 이렇습니다.

성폭행은 물론이고요, 죽을 때까지 때리고, 죽을 때까지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죽어서까지 인권을 유린 당하는, 참혹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북한의 인권과 안보까지, 김현희 씨와 함께 진단해보겠습니다.

[앵커]

지금 안보라 앵커를 통해서 말씀을 들으셨습니다마는 제가 30년이라고 했는데요, 27년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던 KAL기 폭파사건, 27년이 됐는데요.

그때를 회상해 보면서 지금 현재 대한민국 그리고 북한의 인권 실상을 짚어보겠습니다.

김현희 씨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27년 전이죠.

내일이 11월 29일이죠.

그리고 현지 시간으로 오후 2시인가 그렇죠?

[인터뷰]

네.

[앵커]

87년 11월 29일.

많은 분들한테 잊지 못할 날일 텐데, 김현희 씨 입장에서도 특히 그러실 것 같아요.

[인터뷰]

제가 정말 그때는 오기 싫다고 했던 그런 대한민국에 와서 KAL기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지금 27년입니다.

그 긴 세월 동안 돌아가신 분들의 유가족분들의 슬픔과 고통은 여전히 그대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날이 돌아올 때마다 저도 정말 죄송스럽고 그래서 내일이 바로 그날인데,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 번 유가족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드립니다.

[앵커]

시간을 87년으로 한번 가보죠. 언제 임무를 부여받았어요?

[인터뷰]

87년 10월 7일에요.

[앵커]

얼마 안 있다가 사건이 난 거네요?

[인터뷰]

그러니까 한 달간 준비를 했습니다.

[앵커]

훈련은 그 전에 쭉 받으시고, 준비가 된 상태에서?

[인터뷰]

공작원으로요.

[앵커]

명령이 떨어지니까 하신 거죠?

[인터뷰]

제가 중국에 나가있었는데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북한에 들어가서 김승일이라는 조장과 함께 초대소에서 임무를 받았습니다.

[앵커]

중국에서 뭐 하셨어요?

[인터뷰]

제가 그전에는 중국에서 중국인화 교육도 받았습니다.

[앵커]

중국어도 잘 하시는 군요.

일본어도 하시죠?

[인터뷰]

일본어도 배웠고요.

그래서 중국인화 교육을 받았는데 그때 중국에서 불법 이민자에 대해서 신분증 발급해 준다고 그래서 그걸 받으려고 중국에 나가 있었습니다.

저만 들어오라고 해서 임무를 주었습니다.

[앵커]

그러면 명령서를 받았을 때 그때 당시에 김정일이가 주도를 했다라는 것들이 지금 저희가 그렇게 알고 있는데 김정일이 사인한 이런 것도 있나요?

[인터뷰]

직접 김정일이 사인한 걸 주지는 않습니다.

[앵커]

흔적은 안 남기겠죠?

[인터뷰]

그런데 대외정보조사부 그때 보통 부장이 잘 안 나옵니다.

그런데 직접 나와서 저와 김승희를 놓고 딱 서서 김일성 초상화 앞에서 임무를 줬습니다.

88서울올림픽을 맞고 그다음에 남조선 괴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기 위해서 남조선 비행기 한 대를 지키라는 것을 구두로 임무로 줬습니다.

친필에 대한 거는, 원래 당시에 대남 부서를 김정일이가 다 총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한이라는 데가 원래 총 한방을 쏴도 다 김정일의 싸인에 의해서 진행이 됩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연구를 하고 준비를 했는데 그때 김승일이가 많이 의견을 제기했습니다.

지금 바그다드를 통해서 가는 인도선이 전시상황이기 때문에 거기가 아주 안 좋다고 무난하지 않다고 바꾸자고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때 같이 연구를 하는 담당과장이 이미 사인이, 거기에서 사인 비준이라는 말을 김정일한테만 씁니다.

비준이 내려진 거기 때문에 이번엔 그냥 이대로 하자고 그래서 그대로 하게 됐습니다.

[앵커]

이제 지령을 받으시고 비행기를 타고 그때 바그다드 공항에서 폭탄이 걸렸었다고 하더라고요.

[인터뷰]

네, 파다소니 라디오하고 액체폭약입니다.

술병 양주병으로 포장한 액체폭약이 있었는데 파다소니는 특수 제작한 겁니다.

[앵커]

라디오를?

[인터뷰]

라디오인데 뒤에 약이 작은 게 들어 있는데 다 절반씩은 보통 라디오가 움직일 수 있는 전지약이고 절반에는 화약 약품이 들어가 있습니다.

특수 제작을 해서 시간이 되면 시한폭탄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폭파를 하면서 옆에 액체폭약까지 같이 기폭제로 하도록 되어 있는데 특수 폭약인데 그 배터리를 회수를 하는 겁니다, 못 가지고 들어간다고 쓰레기통에 버리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때 아주 위기였죠. 그것이 없으면 임무를 수행을 못 하기 때문에 저는 쓰레기통에서 주워오고 또 김승일은 항의를 했습니다.

이거 라디오 틀어보이면서 이게 그냥 일반적인 라디오인데 이렇게 외국인한테 너무 무리하게 한다고 항의를 하니까 공항 직원이 조금 온정을 베풀어서 무리하다고 생각을 했는지 통과를 해 주었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그래서 중간에 내리셨죠?

그러고 나서 KAL기가 폭발했다는 것을 뉴스를 통해서 들으셨어요?

[인터뷰]

거기가 아랍나라이고 하니까 생각하지도 못했던 바레인으로 가게 돼서 바레인에 하루 묶여있는데 한국대사관 직원이 찾아왔습니다.

[앵커]

한국대사관 직원이요?

[인터뷰]

찾아와서요.

[앵커]

어떻게 김현희 씨가 범인인 줄 알고 찾아왔죠?

[인터뷰]

거기에서 저희가 그쪽으로 갔는데요.

참, 원래는 그렇게 되지 않게 되고 로마로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아브라드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요.

[앵커]

비행기를 못 갈아타겠군요.

[인터뷰]

다른 노선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행기 티켓을. 그런데 김승일 조장이 내리면서 바로 거기에서 타고 온 항공권을 회수를 하니까 의심을 살 것 같으니까 저쪽에서 다시 수석에서 갈아타는 것을 못 내고 연결을 해서 온 티켓을 냈습니다.

그래서 그걸 수속을 해줘서 할 수 없이 바레인으로 갔거든요.

그런데 바레인으로 가니까 거기에서 아침에 사고가 나고는 한국대사관이나 일본 대사관에서 다 추적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아마 저희가 있는 데까지 추적이 와서 저녁에 대사관에서 직접 찾아와서 사고가 났다고, 실종됐다고 그런 얘기를 해서 알았습니다.

[앵커]

그리고 나서 거기에서 체포가 되신 건가요?

[인터뷰]

그래서 임무는 수행했구나.

그런데 이제 탈출이 문제구나.

[앵커]

그 사람이 체포하러 온 건 아니죠?

[인터뷰]

아니고 그냥 확인을 하러 온 거죠.

[앵커]

그러니까 중간에서 내린 사람이 얼마 없는데,

[인터뷰]

그중에 일본인이 저희뿐이었다고 합니다.

[앵커]

일본말으로 했겠네요, 한국대사관에?

[인터뷰]

한국 대사관은 일본말을 못하고 하니까 한문으로도 쓰고 영어로도 하고 김승일과 필담을 했습니다, 써가면서요.

[앵커]

그렇군요.

지금 잠깐만 저걸 보시겠어요?

저때 내려오는 사진인데 1987년 12월 15일이었었죠.

[인터뷰]

네.

[앵커]

이게 대선을 하루 앞둔 날이었는데 저 사진을 보시면 어떠세요?

[인터뷰]

그때는 정말 죽어도 오지 않겠다고 그냥 바레인에서 죽겠다고 막 계속 고집을 피웠는데 정말 오지 않겠다는 한국에 오면서 호랑이 굴에 끌려오는 그런 심정이었죠.

그리고 북한에서 교육을 받은 대로 이제 가면 남산 지하실에서 온갖 고문을 하고.

[앵커]

남산은 아셨네요?

[인터뷰]

네, 거기에서도 알고 있습니다.

지하실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고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하고 죽일 텐데 이 비밀을 어떻게 지켜야 하나.

그런 공포와 떨림이, 내려오면서도 속으로는 대한민국이라는 게 어떤 곳인가 하는 그런 약간의 호기심도 또 들기도 했습니다.

[앵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남북한의 경제를 비교해 봤을 때 60년대, 70년대는 북한이 우리보다 경제력이 괜찮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저희가 대한민국이 역전을 하게 된 것이 80년대 중후반부터 인데 그러니까 역전하기 시작한다는 건 사실은 경제적으로 보면 북한하고 남한하고 그리 큰 차이, 눈에 띄는 차이는 없었을 때가 아닌가 싶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희 씨가 대한민국에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계기가 있었다는 건 어떤 게 있었습니까?

[인터뷰]

8일 만에 자백을 했습니다.

모든 게 그때 벌써 이렇게 차이가 났습니다, 경제적인 거랑 모든 게 차이가. 북한하고는 비교가 안 됐습니다.

[앵커]

그때 벌써요?

[인터뷰]

그때 차이가 났고 북한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그때 그 사건으로.

[앵커]

89년에서 90년 사이에.

[인터뷰]

80년 그때 북한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고 여기는 확실히 모든 게 달랐습니다.

와서 보고 듣고. 그때는 한국말은 하지 않고 일본말, 중국말을 하면서 수사관들이 하는 얘기도 듣고 여러 가지를 봤을 때 북한에서 알고 있는 것과 교육받은 것이 다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리고 온 다음 날에 연구가 있었는데 수사관들이 자기네들끼리 얘기를 합니다.

자기 집에서도 후보가 다 갈렸다고.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후보가 여러 사람이 나올 수도 있고 정말 북한이든 민주자유의 투표라는 말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은 한 사람을 뽑을 넣기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자유로운 그런 투표가 아닌가, 민주적인 투표가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었고 여러 가지 시내도 구경하고 나가서 보면서 정말 활기찬 명동거리랑, 북한에는 그런 데가 없죠.

그런 모습에 저는 충격을 받았고요.

여러 가지 있습니다.

김일성 역사만 최고라고 생각을 했는데 여기 대한민국의 500년 역사가 살아 숨쉬는 창경궁 이런 게 있다는 것도 참 놀라웠고 또 여러 가지 6.25전쟁에 대해서도 남한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늘 어렸을 때 부터 교육을 받았는데 이게 거꾸로입니다.

북한이 한다는 그게 참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앵커]

원래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쭉 밀고 나가는 것이지.

갑자기 당한 나라가 그렇게 될 수는 없죠.

자기네가 먼저 침공을 했다면.

[인터뷰]

그래서 교육받으면서도 약간의 의심이 들었던 점이 있는데 그게 여기와서 풀리면서 북한이 했구나. 그게 몽땅 거짓인 겁니다.

그리고 KAL기 폭파도 통일을 위해서 기여한다고 그래서 해야 한다고 저는 임무수행을 하고 통일에 기여한다고 말을 했는데 통일에 기여하는 게 아니고 그냥 민족상잔의, 무고한 주민을 학살한 거라는 걸 깨달으면서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죠.

[앵커]

이건 조금 다른 얘기인데요.

메구미 씨한테 일본어를 배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요, 북한에서요.

[인터뷰]

저는 요코다 메구미 씨는 저희 동료 공작원인 숙희라는 사람한테 가르쳐줬고 저는 다구치 야에꼬라는 일본인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앵커]

지금 메구미 씨의 죽음의 진위 여부, 얼마 전에도 논쟁이 됐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 뭐라고 그러셨죠?

[인터뷰]

다구치 야에코.

[앵커]

다구치 야에코, 그 분의 행적을 아시나요?

그분의 생사를 일본 정부에 말씀하신 적이 있으세요?

[인터뷰]

그냥 저는 메구미도 만난 적도 있습니다.

몰래 숙희하고 가서 만난 적도 있기 때문에 모든 자료를 일본 정치에 여러 번 다 얘기를 했습니다.

[앵커]

그 사람이 그렇게 죽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인터뷰]

저는 그들이 살아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앵커]

그 이유가 뭐죠?

[인터뷰]

북한이 사망진단서를 일본에 보냈는데 그 사망진단서 이유가 다 허구적입니다.

DNA도 맞지도 않았고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하고 그런 게 다 전혀 북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단지 제 생각에는 다우치 야에코가 그런 데 연관이 있는 그런 사실이 있고 아직까지도 저를 인정 안하고 부정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메구미의 경우에도.

[앵커]

만나 본 적이 있으니까 그 사람도 마찬가지겠군요.

[인터뷰]

그렇고요.

김정일 로열 패밀리에서도 일을 했다고 하니까요.

그런 북한에서는 뭔가 공개되고 싶지 않는 그런 비밀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망으로 이렇게 처리했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북한 납치, 이것이 인권문제의 한 부분인데요.

저희가 북한 국회에서 바로 어제였죠.

국회에서 북한인권의 참상을 고발하는 탈북자들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직접 들으시고 얘기 나누어보겠습니다.

[인터뷰:탈북자]
"매를 맞다못해 어떤 사람들은 자살행위로 이 바늘을 삼키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바늘을 삼키면 이 핏줄따라 바늘이 움직여 지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는거에요. 그러니깐 그 사람들은 더 고통스럽게 죽이느냐고 병반이라는데 입양(원) 시켜가지고 아무 물 한모금도 주지 않는 거에요. 그니깐 결국 말라 죽죠. 저녁에 성폭행이 이루어지더군요. 그 저희가 같이 탈북해온 여성분이 한명 아가씨분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 아가씨분하고 새벽 한 시경이었는데 거실을 통해서 화장실을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제가 목격을 했거든요 그래서 그다음부터 전 한잠도 잘 수가 없었어요."

[앵커]

북한에서 공작원 교육을 받으실 때나 사실 때 북한의 인권이 이렇게 억압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조금이라도 느끼신 적이 있으십니까.

[인터뷰]

북한사람들은 국가로부터 어려서부터 늘 착취를 당하고 또 인권유린의 고통을 당하지만 특히 인권유린이 심각하게 당하는 것은 바로 정치수용소.

그렇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 속에서도 가장 두려워하는 곳이 수용소거든요.

그런데 지금 수용소에 있던 분들이 이렇게 나와서 증언을 하는데 지금 사실 북한에서는 인권이라는 이런 말을 잘 모릅니다, 원래.

왜냐하면 인권은 곧 북한 정권하고 관계가 돼 있거든요.

그래서 북한이 하나는 전체를 위하고 전체는 하나를 위한다는 구호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수령 하나에게 인민이 다 복종해야 되고 인민은 곧 노예라는 소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노예 같은 인민들에게 인권을 다 보장을 해 주면 수령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니까 북한에서는 인권이라는 말도 가르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북한 인민들이 이렇게 당하고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면서도 여기에 저항하고 뭔가 자신의 인권을 이렇게 요구를 한다는 거 자체를 모릅니다.

요새 UN에서 인권결의안이 통과되고 하니까 북한이 거기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지금 평양에서 김일성광장에 민중집회도 하면서 미국 비난과 함께 그걸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거기에 참가한 수많은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이 그 뒤에 인권결의안 규탄, 반대한다고 그러는데요.

인권이 뭐지 하고 아마 북한 사람들도 저 인권이라는 게 과연 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을 할 겁니다.

그리고 북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남을 비판은 잘하지만 자기 인권를 위해서 뭐를 해 달라고 요구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참혹한 수용소 이런 생활을 보면서도 지금 UN에서 결의안이 채택이 됐는데 남한에서 10년 동안이나 지금 아직도 이렇게 미뤄지고 있잖아요.

그냥 눈치만 보면서 북한에 자극한다고 해서 못하고 있는데 저는 그건 정말 대한민국 국회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참상에 눈을 감는다면 그리고 제가 그 전에도 얘기를 했지만 그러면 이 대한민국에 수용소 체험관이라고 만들어놓고 거기에 단 하루라도 가서 체험을 한다면 그 수용소의 비참함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국회에서도 아마 올해는 통과를 시킬 것 같은데 앞으로도 계속 이런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그게 대한민국에서 필요한 얘기죠.

오늘 말씀 시간관계상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인터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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